나도 IRP 통장이 생겼다

2장. 알고 보니 자유를 얻은 것이었어요 (10편)

by 니나

나는 여름을 사랑한다. 겨우 5월 초인데도 낮 기온 25도를 넘나드는 날들이 이어져 봄 재킷을 꺼내 입기 애매해졌다. 벌써 여름이 온 것이다. 나는 여름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름이 온 것을 공기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어느 날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는데, 문득 포근한 햇살 냄새가 느껴질 때가 있다. 따가운 햇볕에 잘 말린 면이불에 얼굴을 묻고 킁킁댈 때 맡을 수 있는 따끈하고 고소한 냄새라고 할까. 공기 중에, 길 위에, 어깨 위에 아직 조금 남아있는 눅눅하거나 서늘한 겨울의 느낌을 한껏 말려버리겠다 싶은 냄새가 있다. 이 여름 냄새를 공기 속에서 발견하면, 콧속의 솜털을 한껏 세우고 숨을 들이마신다. 갑자기 여름이 예상치 못하고 문을 똑똑 두드린 것 같다. 그러면 몸속의 긴장이 스르르 밖으로 밀려나듯 차분해지고 기분은 붕 들뜬다. '아! 여름이다' 슬며시 미소가 얼굴에 떠오른다.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미소가 사라지고 불편한 느낌이 스멀스멀 명치끝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이달 중순에 정식으로 회사를 퇴사한다.


퇴사일이 다가오는 것은 알았지만 시간 개념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한 달 이상 남은 줄 알았다. 그러나 코앞까지 불쑥 가까워진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모르는 번호로부터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OOO 증권 OOO 팀장입니다. 싱가포르의 OOO 님으로부터 공유받고 연락을 드립니다. 로란님 되시나요?“

아! 이게 그 말로만 듣던 IRP 계좌 개설 안내 전화구나. 그런데 벌써? 아직 한 달 반가량 남지 않았나? 의아함을 뒤로하고 내가 그 사람이 맞다고 했다. 내가 퇴직하게 되어서 IRP 계좌 개설이 필요하니, 언제 한번 내방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몇 가지 질문을 받았다.

"몇 가지 확인이 필요한데요, 일반적인 퇴사인가요? 그렇지 않은 것인가요?"

귀로는 들어오는데, 무슨 의미인지 금방 이해되지 않았다. 일반적인 퇴사와 아닌 퇴사가 있단 말인가? 순간 글로벌 구조조정으로 인한 퇴사인지를 묻는 것인가 싶어, 구조조정으로 인해 퇴사한다고 밝혔다. 그 메일을 받은 지도 거의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내가 구조조정 대상자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살짝 그리고 짧게 뱃속 깊은 곳에서 불편함이 움찔거렸다. '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것인가? 내 퇴사가 일반적이니 아닌지 내가 판단하고 찾아보고 이야기해야 하나? 차라리 구조조정 대상이냐 자발적 퇴사이냐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게 어때?' 겉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속이 매우 좁거나 자격지심이 있거나 여전히 회사가 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직설적인 말들은 입 밖으로 내뱉기 불편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본인 편하게 하자고 에둘러 이야기하는 순간, 상대방은 그게 무슨 뜻인지 잠시 고민하면서 스스로 상처 입을 수 있다. 물론 나와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불편할 수 있는 이슈에 대해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면 그 또한 당황스러운 또 다른 상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 행정적인 업무로 처음 연락하는 사이에 이런 에두름은 배려도 아니고 편하지도 않았다. 상대방은 별 뜻 없이 내뱉은 '일반적인'이라는 단어를 나는 '정상적인' 으로까지 확대해석 하고 있었다. 적당한 일정에 내방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문자로 명함을 받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깨달았다. '진짜 백수가 되기까지 이제 겨우 2주가 남았구나!‘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며,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사실 긴 휴가 중이었기 때문이다. 글을 잘 써보고 싶다고 소행성 워크숍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직 진짜 백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통장에는 월급이 아직 들어오고 있었고, 덕분에 나는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 자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책을 사들였고, 여행을 다녔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더니 대책 없는 나라는 인간에게 한숨이 나왔다.


외국계 기업에는 Garden Leave (가든 리브)라는 제도가 있다. 동종 업계로 이직 시 회사 내 주요 정보가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퇴사 의사를 밝힌 순간부터 약 1~2개월간 퇴사는 하지 않으면서 회사 사내망에는 접근이 안 되어 그 기간을 휴가처럼 보낼 수 있는 제도이다. 모든 퇴사자에게 늘 제공하는 것은 아니나, 이번 글로벌 구조조정에서 혜택처럼 제공이 되었다. 단어 그대로 집안에는 못 들어가면서 대문 밖으로도 못 나가는, 그래서 정원에 머무르는 상태의 휴가 기간이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의 위자료처럼 이 기간의 월급으로 나는 아직 윤택한, 소위 말하는 백수답지 않은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당장 건강보험이 지역 보험으로 바뀌겠구나. 엄마와 나는 갑작스럽게 20년 만에 지역보험료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구나. 마이너스 통장도 있으니, 연장하는 내년 초가 되기 전에 다시 월급 직장인이 되거나 아니면 다 갚아야 하겠구나. 혹시라도 운 좋게 집을 살 기회가 생기더라도 주택담보대출을 받으려면 직장인이어야 한다는데, 내가 백수일 때 마침 사고 싶은 집이 저렴하게 나타나면 어떡하지?’ 온갖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작가가 될 운명인가 봐, 난 작가가 되겠어!"라고 선언하고 브런치를 개설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도 않았다.(이 일이 있었을 때가 5월 초였다) 그런데 나는 그 전화를 받은 직후부터 월급쟁이가 아닌 홀로서기에 대해 벌써 겁을 먹고 불안해하고 있다. 봄날처럼 따뜻했던 내 주식계좌의 수익률 숫자는 어느덧 바깥 날씨와는 다르게 차가워지고 있었다. 내 인생 2막의 성공적인 시작을 지원해 줄 든든한 지원 군들이 예상과는 다르게 맥을 못 추고 있었다. 하지만 결심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렇게 쫄았냐? 이런 소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뒤따른다. 내 마음이 선택한 이 새로운 길이 기대만큼 성공적이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이긴 하다. 그동안 나는 원래 내 직업과 좀 더 멀어질 것이고, 그사이 내 동료들은 더 성장하고 더 좋은 경력을 쌓아갈 것이다. 내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한다는 자유는 안정된 직장생활과 달콤한 월급을 뒤처질 수 있다는 불안감과 바꿔치기했다.


불안한 마음에 또 남자친구에게 우다다다 내 불안한 감정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알렸다. 핸드폰 배터리가 다되어서 외장 배터리를 붙이고 귀가 뜨거워지도록 이야기하다 보니, 하소연이 아니라 '이러다 안되면 너한테 거머리가 되어 들러붙겠다' 식의 심보를 미리 으름장 놓는 것 같았다. 조금 미안하기도 한데 어쩔 수가 없다. 너라도 계속 경제활동을 열심히 하여 나중에 내가 불쌍해지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예쁜 운동복도 사주고 공과금도 가끔은 대신 좀 내주렴. 다행히 남자친구는 엊그제 카페에서 브런치에 글을 쓰는 내가 너무 좋아하는 것이 보여서 본인도 좋았다며, 일어나지 않은 앞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고 지금을 즐기자고 말해주었다. 아 이 사람 또 나를 울컥하게 만드네. 가끔 미울 때도 있지만 이럴 땐 정말 나의 따뜻한 곰돌이다.


다음날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 중, A가 무슨 할인권이 생겼다며 옷 사겠냐고 물어본다. "그래~ 옷이 좀 필요해. 저녁에 만나자~"라고 약속하고는 곧 내가 한심해졌다. ‘지금 이 와중에 옷이라니!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절약하며 살자고 겨우 10시간 전에 결심하지 않았니?’ 다행히 그런 내 결심을 하늘이 도운 것인지, 그날 바쁜 일로 쇼핑하지는 못했고, 나는 옷 살 돈을 아낄 수 있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꼭 작가로 돈을 벌어야겠다. 아니 데뷔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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