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알고 보니 자유를 얻은 것이었어요 (9편)
"내가 부족한 걸까? 나 예전에는 인터뷰 보면 곧잘 합격했었는데, 그래서 내가 가고 싶은 곳 선택해서 갔었는데. 나 왜 이러는 걸까? 나 부족한 거야? 이래서 회사 잘린 거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했지만, 친구 A에게는 불안감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섬세하고 마음 따뜻한 친구지만, 또 한편으로는 냉정하리만큼 이성적인 친구라, '그래 이런저런 것들을 좀 해봐.' 라거나 '그건 이런 이유 때문이야.'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혹여 그 말에 내 가슴이 쿡 찔려 피가 줄줄 새더라도 알고 싶었다. 진짜 내 문제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당연한 거 아냐? 그때는 주니어였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몸이 커졌으니 나랑 맞는 회사 찾는 데 시간이 당연히 더 걸리지. 원래 시간 걸려“
어이없어하는 그녀의 말투에 갑자기 안심되었다. 그렇다고 안심하라고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도 나는 그리 호락호락한 연차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와 맞는 회사와 자리를 찾는 데에는 운이 따르지 않으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녀의 이런 말이 아니었다면 나는 또다시 ‘왜 나야?’ 질문의 블랙홀에 빠질 뻔했다. 참 고마운 인연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천천히 마음에 드는 회사를 찾아보려고 작정했었다. 섣불리 지원하고 일을 시작했다가 빠르게 번아웃되거나 어렵게 한 이직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슴 설레는 일이나 직장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회사와 이별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벌써 불안해지고 조급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불안감이란 참 묘한 존재라, 어떨 때는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지만 어느 순간 어떤 작은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낸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 여기 있어요~' 정도가 아니라 내 하루와 내 전체를 잠식해 버릴 만큼 갑자기 커져 있어서 그것 자체만으로도 불안해진다. 그리고 갑자기 불안해하는 내 모습이 더 불안하다. 구직하는 입장에서 가장 조급해질 때는, 나와 비슷한 경력을 가진 지인과 친구가 나도 가고 싶었던 좋은 회사에 잘 취직해서 출근하는 것을 볼 때가 아닐까 싶다. '내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면 저 자리는 내 것이었을까?'라는 질투 섞인 부러움이 생긴다. 이어서 '나만 이렇게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이 엄습하며, 그 생각이 길어지면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추락하고, 내가 속했던 사회에서 무시당하거나 축출당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커지게 된다. 나의 구직 과정에도 포모(FOMO, Fear Of Missing Out, 놓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감정)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작년 여름휴가의 일이다. 문경 지역 와이너리가 있어 잠시 들렀는데, 평일 오후여서 우리 일행만을 위한 와이너리 투어를 할 수 있었다. 증류주와 일반 와인에 이어 샴페인과 같이 기포를 포함한 스파클링 와인 제조하는 과정도 상세히 볼 수 있었다. 와이너리 투어 온 관광객용으로 전시해 둔 것이겠지만, 세계 테마 여행 같은 프로그램에서 본 것처럼 수십 개의 와인병들이 비스듬히 아래쪽을 보고 꽂혀있는 자태가 신기하고 엄숙했다. 발효가 진행된 와인들을 비스듬한 선반에 거꾸로 올려두고 병을 정기적으로 돌려주게 되는데,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찌꺼기들이 병뚜껑 쪽으로 모여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찌꺼기가 충분히 모이면 급속으로 얼려 순식간에 빼내는 데고르주망 (degorgement) 작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착즙과 발효뿐만 아니라 병입 전 찌꺼기를 빼주는 작업까지 거쳐야 맑은 액체에서 잔잔하게 올라오는 기포의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있다. 나는 나중에 있을 좋은 날을 위해 그 스파클링 와인을 여행 기념으로 한 병 구매했다. 그리고 그 와인은 여태껏 열리지 못한 채 어두운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누리는 자유, 예를 들어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평일에 친구와 약속을 잡을 수 있는 자유, 일주일 이상 길게 여행 갈 수 있는 자유, 주어진 24시간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쓰는 것을 내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는 정말이지 사치스럽게 좋아서 가끔 닭살이 돋는다. 바쁜 직장인으로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주말에도 노트북을 끼고 살았던 그때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 바치고 돈을 벌었다. 이제는 반대로 그 돈으로 시간을 사고 있다. 이처럼 럭셔리한 소비가 또 있을까. 나는 이 시간이 너무도 소중해서,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허투루 사라져 버릴까 봐 구글 캘린더에 기록해 가며 아껴 쓰고 있다. 그 시간으로 재충전하고, 인연들을 지키고, 미래를 고민하고 계획하고 있다. 비록 남 보다 뒤처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함은 차곡차곡 쌓이겠지만, 지금의 자유가 너무 귀중해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의 삶은 불안을 떨쳐내고, 새로운 불안을 맞아들이고, 또다시 그것을 떨쳐내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했다. 어차피 불안의 연속이라면, 지금의 자유를 충분히 즐기고, 다음 불안을 맞이해봐야겠다. 언젠가 데고르주망 작업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아름다운 기포와 함께 영롱하게 빛날 샴페인 같은 내 미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