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는 꼭 달리기하세요

2장. 알고 보니 자유를 얻은 것이었어요 (8편)

by 니나

달리기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람들 사이에 달리기 붐이 일어 RunDay (런데이, 달리기 목표 달성 앱)나 Nike Run Club (나이키 런 클럽, 나이키에서 제공하는 달리기 기록 앱) 등으로 기록한 달리기 인증샷들이 SNS를 도배할 때도 등산가고 걷기하고 요가는 했지만 달리기는 그다지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건강도 챙기고 다이어트도 해보겠다고 저녁에 인터벌 러닝을 한두 번 했더니, 심장이 너무 벌렁거리고 죽을 것처럼 숨이 차올라 헉헉거리며 주저앉아버린 후, 달리기를 다시 해보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발리 여행에 이어 제주도 한달살기 숙소를 구할 때, 한 후기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갑자기 달리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숙소에서 송악산까지 뛰면 왕복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그 후 집으로 와서 산방산을 바라보며 식탁에서 먹는 우유와 토스트가 꿀맛이었어요' 세상에 이렇게 멋있는 제주살이가 또 있을까!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집을 선택했고, 한달살기 짐을 쌀 때 달리기를 위한 신발과 옷 들을 챙겼다.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들른 마트에서는 식빵과 잼, 치즈, 계란, 우유도 야심 차게 골라 담았다. 나는 후기를 작성하신 그 분처럼 아침 달리기를 하고 산방산을 보며 토스트를 먹을 테다!


아직은 쌀쌀한 3월이었다. 어스름 해가 뜨기 시작할 때 마당에서 스트레칭을 가볍게 하고, 애플워치에서 달리기 시작을 누른 후, '나 다녀올게~'를 외치고 동네를 내달렸다. 인터벌 러닝에서 너무 힘들었던 추억이 있어서 그렇게는 하지 않았고, 그냥 내 페이스대로 뛰다가 힘들면 좀 서서 쉬거나 걸어보자 하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만 뛰어도 숨이 너무 차올라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1킬로쯤 뛰다가 쉬고, 500미터쯤 뛰다가 또 쉬고. 이게 걷는 건지 뛰는 건지 구분도 안 갔지만, 그래도 계속 나를 앞으로 나가게 해준 건 내 왼쪽으로 펼쳐진 바다였다. 막 떠오른 태양에 바다가 반짝였고, 세화바다 중간에 떠 있는 형제섬과 태양과의 각도를 매일매일 비교해보는 재미가 좋았다. 운이 좋으면 두 개의 형제섬 중간으로 딱 떠오른 태양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러면 거기가 캠핑 명당이다. 어떻게 알 수 있냐면, 딱 그 위치에서 까치머리를 한 채로 차 한잔과 함께 일출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캠퍼 분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형제섬 사이 떠오르는 일출을 사진에 담고자 출사 나오신 분들을 볼 수도 있었다. 형제섬 풍경을 바라보며 바닷가를 달리는 재미를 느끼다가, 보는 재미가 조금 심심해질 때 즈음 되면, ‘여기까지만 와~’ 라고 나를 지켜봐 주듯 서 있는 돌하르방이 나타난다. 돌하르방이 서 있는 곳은 해안에서 살짝 톡 튀어나와 있는 위치라, 그 기점을 지나치면 저 멀리 드디어 산방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쯤 잠시 서서 숨도 고르고 바다 사진도 찍고 돌하르방도 한번 쓰다듬어 만져본다. 그리고는 저 멀리 보이는 송악산을 향해 다시 달리기를 시작한다.


바다에서 달리기를 하면, 도대체 몇 킬로미터인지 잘 감이 안 잡힌다. 서울에서 달릴 때는 트랙 길이를 미리 알거나, 달리는 길바닥이나 옆에 시작점부터의 거리가 적혀있다 보니, 얼마나 뛰었는지를 대충 알 수 있다. 그래서 더 빨리 지루해지고 안주하는 마음이 들어서 쉬이 힘들어지고 지쳤는데, 여기서는 애플워치나 핸드폰을 보고 뛴 거리를 확인하지 않으면 얼마나 뛰었는지를 알 수 없으니 오히려 더 멀리 더 오래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달려 도착한 전환점은 송악산이 잘 보이는 주차장 부근의 편의점이었다. 그곳에서 이온 음료를 하나 산 후, 바다를 보고 거친 숨을 고르며 시원하게 들이켰다. 헉헉거리는 숨에 나는 내 폐부 깊은 곳의 텁텁한 기운을 몰아내고 제주 바다의 신성한 공기를 집어삼켰다. 눌러쓴 모자 밖으로 튀어나온 머리카락에 맺힌 땀방울들이 뚝뚝 떨어지다가 이내 아침 공기에 차갑게 식어갔다. 그 땀방울은 오늘 아침까지 가지고 있던 내 못된 생각들의 찌꺼기같아, 수건으로 싹 닦아내면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편의점 앞 작은 정자 같은 곳에서 장난치며 놀고 있는 날렵한 백구와 그보다 좀 작은 검은 강아지를 넋 놓고 구경하다가, 땀이 식어서 왠지 으슬으슬 추워진다 싶으면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집으로 달렸다.


하루는 바다 안개가 자욱한 날이었다. 미세먼지가 제주도까지 덮쳤다면 아마 그날 내 폐는 그 미세먼지를 듬뿍 머금고 거의 절여지다시피 한 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달리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고민할 때는 그냥 한다 싶어, 그날도 뛰었다. 바다는 안개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저곳이 바다였지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보도블록이 없었다면, 나는 어느 순간 바다를 향해 질주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하늘과 바로 코앞이 분간되지 않았고, 앞뒤 좌우가 모두 하얀 구름으로 꽉 찼기에 이 넓은 우주에 나만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앞뒤 좌우로 대충 5-10미터 정도만 볼 수 있었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달리고 있다 보니, 움직이는 반투명 반구 중앙에 뛰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내 반구 안으로 누가 쑥 들어왔다가 나를 지나쳤다. 나처럼 아침마다 이곳을 달리고 있어, 종종 마주치기도 했었다. 바로 돌아보는데 그 사람은 어느새 내 반구 밖으로 빠져나갔는지 하얀 안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싹하고도 묘한 기분이었다.


서울에 비하면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이 길을 뛰면서 인간관계를 생각했다. 내 인생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예고 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사람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돌아보기도 하고, 그러다 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고 헤어지며 각자 갈 길을 가겠지. 그렇게 헤어지며 울적할 수도 있겠지만, 같은 방향의 동행을 만난다면 더 반가울 것이다. 방향이 같아 반가워도 속도가 다르다면 오래 함께하기는 어려운 인연이다. 무리해서 보폭을 맞추다 보면 탈이 날 수도 있다. 그래서 달리기는 인생 같았다. 함께할 수도 있지만 혼자일 수도 있다.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숨소리, 발소리, 바스락거리는 옷소매 소리가 가득하고,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빠지고 허벅지는 터질 것 같이 힘들어진다. 더 달릴지 말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다. 쉬어도 되고 더 달려도 된다. 달린 거리보다 중요한 건 내가 그 달리기에서 만족하느냐이다. 그 고민의 순간을 잘 넘기면, 어느 순간 통증도 둔해지고 그냥 내달리고 있다. 혼자 달리기는 힘들고 외롭지만, 어느 순간 나는 나와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여느 때처럼 편의점에 들러 이온 음료를 마시고 반환점을 돌아 다시 돌아오는 날이었다. 편의점 앞에서 보던 백구와 많이 비슷하게 생긴 개 한 마리가 인도와 해안을 구분하는 울타리에서 고개를 살짝 빼꼼히 내밀고 나를 지켜보는 것이 아닌가. 들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애써 그 시선을 외면하고, '나는 네가 무서워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원래 이렇게 달렸단다.'라고 마음속으로 이야기하며 무섭지 않은 척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 개가 쑥 튀어나와 '난 너한테 관심이 없어. 그냥 저 집에 가려던 참이었어.'라고 하듯 내 옆을 지나 길가 어느 가게 앞마당으로 쓱 들어갔다. 그러더니 또 불쑥 나타나서, '신경 쓰지 마, 나는 저 풀숲에 볼일이 있어.'라는 식으로 내 앞을 가로질러 풀밭에 들어가 뒹굴뒹굴했다. 그렇게 뛰고 있는 나를 두고 앞뒤로 대각선으로 휘적휘적 지나다니더니, 그 간격을 슬그머니 줄여서 어느 순간 내가 데리고 온 강아지인 양 내 오른편에서 보폭을 맞추며 함께 달렸다. 무섭다는 마음은 그 누렁이가 멀리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다가와 주는 틈에 어느덧 신기하다에서 편안하다는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쌀쌀한 아침에 이 길을 혼자 달리는 것보다는 따뜻한 생명체가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에 안정감을 느꼈다. 게다가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와 준 인내 어린 배려가 사랑스러웠다. 이 개는 페이스메이커 역할도 기가 막히게 잘했다. 덕분에 나는 돌아가는 길은 힘든지도 모르고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이 녀석을 보며 '이래서 살아가는 데 동반자나 친구가 필요하구나, 그게 일이든 가정이든.'라며 내 소중한 주변 인연들을 다시 떠올렸다.


페이스메이커와 보디가드가 되어준 그 녀석은 마당까지 쫓아 들어왔다. 시원한 물 한 사발과 토스트용 식빵을 얻어먹고, 귀엽다며 이쁘다며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좋은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헤벌리고 꼬리를 쉴 새 없이 흔들어댔다. 언제까지 그러나 걱정했는데, 몇 분이 지나자 이젠 됐다 싶은지 쿨하게 훌쩍 떠나버렸다. 낯선 제주도에서 만난 낯선 생명체와 이렇게 짧고 깊은 조우라니, 너무 매력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 이후로 한동안 여행을 갈 때마다 운동화와 달리기 복장을 꼭 챙겼다. 낯선 그곳에서 새로운 인연이, 감동이, 고찰이 이곳에서처럼 이어질지 또 어찌 알겠는가.


송악산 편의점에서부터 같이 뛴 백구가 식빵을 얻어먹고 입맛을 다시고있다.



며칠 후 나를 따라 같이 뛰었던 그 개는 이온 음료를 사던 편의점의 백구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쩐지 닮은 것 같더라.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맨날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람을 쫓아다닌다는 녀석이란다. 그래서 이 동네 유명 인사란다. (몰라봐서 미안하다) 게다가 나랑은 원래 엮어질 인연이었는지, 빵을 세상에서 젤 좋아한다나. 조만간 다시 사계 해안을 가서 백구를 만나면 그때처럼 스치듯 달려봐야겠다. 그때 같이 뛰던 나를 기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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