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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향선 Nov 02. 2024

한국양반교육이 사라지면 세계속에서 살아날수없어

한가정교육이 한개인의 미래와 나라의 미래을 열어가..가족의 화합이 희망

어제 여동생이 오늘 병원에 와서 하루종일 엄마을 돌보라고해서 조카들을 부르라고 했다. 조카들은 애기때 부터 아프면 어머니가 돌보았다. 그랬더니 올캐는 애기들의 서너살이 되어도 더 커서도 아이들이 아프면 며칠씩 어머니에게 맡기었다. 애들이 건강이 좋아지면 데려갔다.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계실때 동생들에게 조카들보고 병문안오라고 이야기 했다. 조카들은 바쁘고 대학을 다닌다고 했다. 모두들 안왔다. 아버지가 죽어서 장례식장에 가자 그때서 왔다. 어머니가 조카가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고좋아하셧다. 

어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한국청년해외봉사단 귀국모임에도 아이디어을 내면서 유성에 갔다가 엔시백화점을 가서 옷구경을 하는데 전에 충남대전세종커뮤니티 대표도 몸집이 큰데 천안에서 내려오면서 애기을 남편에게 맡기고 오면서 옷을 단정히 입기위해 옷을 사다가 남편과 다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남편이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다투기도 했다는 것이다.그곳에도 내사이즈인 88.99는 없었다.105도 여성비지니스정장도 없었다. 가만히 보니 그전에 식당에서 같이 일하던 홀에서 일하던 여자가 옷외투를 사라며 유성에 엔시백화점을 가라고 추천했다.

옷은 좋다.한데 여성  비지니스정장슈트는 별로 없다. 그냥 입고다니는 잠바에 편안한 바지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여성인재을 키울까 생각이 든다.우리때는 대학에 만가도 정장을 입고 다니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후배에게 자식잘키우라고 이야기 하고 간혹 코바모임을 할터인니 가끔씩 나오라고 했다. 

내가 처한 이상한 상황도 이야기을 하면서 엔시백화점의 이층에 위치한 그리니쉬카페에서 대추차 한잔을 마시고 나왔다.  관엽식물이름도 예전과는 다르다. 카페아가씨에게 물으니 신종이라는 것이다. 서울에 양재꽃시장을 가볼까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20여년전에 잠깐 난원에서 일을 했는데 그곳은 이력서도 안받는다. 그곳의 오너는 연암전문대을 나오는데 그대학은 창업자금과 창업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충남대는 대학에서 공부만 하고 졸업하면 그만이다. 

어제 버스을 타려다 그 정류장 앞에 김밥집에서 메뉴판이 없어서 포스터을 보고 김밥을 시켯는데 너무 매웠다. 다시 메뉴판이 없냐고 물으니 키오스크에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김치을 잘 잘라놓으라고 햇다. 

버스을 타고 잠깐 동네 피시방에가서 검색을 하고 글을 쓰는데 자꾸만 눈이 감기는 것이다. 글을 쓰는데 자꾸만 틀리게 타이핑이 되서 그냥 나왓다. 

집에 와서 좀 치우고 그대로 좀 누워있는데 여동생이 전화가 왔다. 내일 병원에 와서 어머니 병간호하라고 ... 

잠시 누었다가 딸이 오고 굴된장국과 굴전을 안먹는다고 해서 그냥 누웟다.너무 잠이 와서 어떻게 할지을 모르겠었다. 딸이 나와서 영화인가 드라마을 본다는데 누워있었다.  딸이 밥은 먹기 싫다고 해서 밖에서 칼국수을 먹자고 하니 그럼 자기가 마라탕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라 고 하고 누워있다가 마라탕을 조금 먹고 누워서 잠이 들어 열시에 일어났다. 딸은 자기 방을로 들어가서 이야기을 할수가 없었다..;. 

식당에서 일해보면 식당에서 물을 안먹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면 아침에 커피을 사가지고 와서 먹으면서 일을 하거나 하지 식당에서는 물을 잘 안마신다. 나는 더우면 물을 마시고 식당에서 일을 하다보면 언니들은 알루미늄캔에 탄산수을 권한다.  

 일을 하면서 이온음료나 물을 먹어야 수분이 보충이 되질 않는가? 식당에 외국인노동자도 많고 한국인 중년여성 요사이는 젊은 남자애들도 많다.  음식을 먹고 자꾸 졸리는 것이 식곤증일까?   

어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월급은 적지만 글쓰는 일을 한다고 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 별의별 생각도 다 햇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에게 다녀와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전에 전라도 순천 승주군 선암사에서 스님생활을 하신 응암(응봉)스님의 제사에 꼭 한번 참석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1995년 방글라데시에서 돌아와 KOICA추천으로 UNV추천서을 받기위해 서울을 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외할아버지가 위독하다고 해서인가 열반하셧다고 했던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순천으로 기차을 타고 갔다. 나는 서울로 가서UNV추천서을 받으러가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셧다.. 

그런데 내가 유엔브이로 부탄을 다녀온 후에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 제사에 한번도 간다고 나서지 않았다.. 

다만 선암사에서제사을 지내는 외할머니 제사때 큰이모에게 제사돈을 부치면서 그저 복이 없는 늙은이는 죽어서도 복이 없다고 얼마나 외로웠으면 추석에 마쳐서 죽냐고 한숨을 쉬셨다. 

외할머니는 아들이 없으섰다고 한다. 아니 어머니에게 국민학교 5학년까지 살다간 남동생이 있다고한다. 아파서 죽었다고 한다. 첩이 갖은 비법을 써서 죽은 것이라고 이야기을 하면서 자신은 그래서 간호사가 되었다고 했다. 

우리외할머니 자식들은 잘 되지을 않았다고한다. 외로워서 인지 큰 이모도 외삼촌이 변변치 않게 되어 이종큰오빠 고등학교을 할머니가 보내 주셨다고 한다. 큰이모부는 일정시대에 학교을 나와 고등학교 영어선생을 햇는데 어찌된 일인지 일이 잘 안풀리었다고 한다. 그 오빠는 대전에 사는데 올캐는 여섯자매중 장녀라 친정에만 신경을 쓰고 우리 이모에게는 잘신경을 안쓴다고 한다. 그러다 재혼을 했다고 한다.

이모가 갔는데 오빠가 꼬깃꼬깃한 돈을 이모에게 주더란다.올캐의 아버지가 강원도에서 학교교장을 햇다고한다.그런데 그 오빠는 외할머니제사에 가보는지 모르겟다. 

우리 외할머니는 양반으로 최씨문중에 무남독녀였다고 한다. 응암스님인 둘째 마누라는 첩으로 술집에서 일하는 잡부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식들이 잘되었다고한다. 아들이 서넛되고  막내딸은 대학총장의 며느리인가 대학교수의 아내가 되어 배움이 많지 않아 무척 고생을 했닥 한다. 

아무튼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식들은 공부도 잘하고 앞길이 탄탄한가 보다.외할머니는 시집올때 전답을 가지고와서 집안을 풍족하게 했단다.  첩의 자식인 외삼촌들과도 외할머니가 같이 살았다고한다. 자식들을 키우고 혼자 사시기도 해서 우리가 겨울방학에 갔지만 나중에는 순천에 사는 첩의 자식들과 살았다고한다. 

그래서 인지 술집여자인 첩의 자식중에 막내외삼촌은 우리 외할머니에게 잘했고 외할머니 꿈만꾸면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쌍암의 집은 막내 외삼촌차지가 되었는데 친척들이 별장으로 쓴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들들이 장성을 했으니 외할아버지 제사에 우리 어머니와 이모들을 안부르는 것은 아닌지? 외삼촌들은 어디에서 양반교육을 받았겠는가?  외할아버지도 그것을 아시기에 자신의 아들들을 우리 할머니와 같이 살게 하지 않았겠는가? 

백화점에서 입점한 식당에서 만든 음식과 난전의 식당에서 쟁반도 없이 만들어 지는 음식과 어떤 음식이 먹고 싶은가? 국밥하나에 김치나 깍두기하나에 그냥 밥을 먹는 것과 따스한게 만든 반찬 몇가지와 밥을 먹는다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최씨 문중의 양반 아가씨였던 외할머니는 동네에서 음식솜씨와 바느질 솜씨가 좋아서 모두들 좋아했다고 한다.  큰 이모님은 1996년에 선암사에서 절음식을 하는 보살로 계셨고 막내 이모도 순천에서 식당을  하셨다. 

술집에서 술이나 팔던 여자가 그대로 자식을 키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외할아버지도 아시기에 외할머니에게 자신의 아들들을 맡긴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아들들에게는 우리 외할머니는  자신의 어머니의 연적이고 밉게만 보지 않았을까? 

어머니가 서울에 친척의 행사에 갔는데 배다른 형제들이 참석을 해서 인사도 안하고 자기들끼리 식사을 하더란다. 감히 술집여자의 자식 그것도 첩의 자식들이 어떻게 친척들의 모임의 대소사에 자신의 자식들까지 데리고 다니며 인사을 다니면서 자신의큰어머니자식인  우리 어머니에게 인사도 없이 친척행사에 참석해 밥을 먹는단 말인가? 

예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냥 지나가려고 했는데 딸이 크면서 증조외할아버지 이야기을 하니 순천에 기차타고 선암사에 가고 싶다고 한다. 

불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말이다.. 

그런데 그냥 가면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쩔까 걱정도 된다. 어머니는 여동생이야기로는 6개월밖에 못사는데 ...제사는 11월 초로 알고 있다.

어머니도살아생전에 아버지 돌아시고 근 30년 세월 아버지 제사에 참석을 못했다.우리에게는 전전긍긍하고 이야기을 못하고 속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구 엄마 하는데 우리 어머닌는 아이구 아버지 하셨다. 

첩의 자식이 잘되면 얼마나 잘될 것인가? 첩의 아들들이 잘되서 서울로 명문대에 들어갔는데  어느 큰마트에 들어가 감사로 일하면서 출장을 갔다가 원인도 알수 없이 죽었단다.  사람들은 벌 받았고 이야기 한다고 한다.  젊은 아내는 아이들도 어리다고 한다. 

선암사주지스님이 이일을 돌보아 줄지 의문이다.

첩의 장남인가가 아버지 환갑에 오셨다. 어머니는 너무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시집살이을 하면서도 친정에서 나서서 엄마일을 해결해줄 친정오빠나 친정남동생이 없다고 했었다. 남자형제의 중요성을 항상 이야기 하셨다. 

첩의 자식이 어찌 본처의 자식들이 제사에 초대을 않는단 말입니까? 어디에서 제사을 지내는지 첩의 장남집에서 제사을 지내는지 아니면 선암사의 대웅전에서 제사을 지내는지? 저의 외할머니는 화장을 해서 뿌리고 선암사의 절에서 추석무렵에 제사을 합니다. 

흔들이 술집여자인 첩의 시신은 어떻게 했는지?화장을 했는지 묘을 썼는지? 지금응암스님은 묘을 썼는지 아니면 화장을 했는지?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십니다. 할아버지는 속세에 성이 김씨이고 선암사 재무스님도 하고 쌍암의 여러마을 이장도 했고 동네사람들에게 좋은 일은 다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재산이 어디서 나서 사람에게 인심을 쓰고 다녔을까요? 아무리 선암사에 재산이 많다고하지만 말입니다. 절의 재산은 공고의 재산입니다.누가 개인의 일에 절의 재산을 쓴단말입니까? 

태백산을 쓴 조정래씨 아버지도 선암사에 스님이셨다고 합니다. 태고종은 대처승의 본산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영향과 아버지가 불교라  고등학교에서 불법을 공부했지만 학교가 카톨릭이라 예비자 교리도 배우고  중학교는 기독교미션스쿨이라 신약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종교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방글라데시에  가서 회교에 대해서도..방글라데시에서는 정년퇴직을 앞둔 공무원의 자식이 찾아와 저에게 하소연을 한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첩을 얻어서 자식을 보고 사는데 공무원 정년퇴직금을 가지고 걱정을 하는 것 같더라구요.저는 이야기을 들어주기만 했습니다.. 

저의 외할아버지 제사에 저도 한번 가서 절을 올리고 저의 딸도 절을 올렸으면 합니다. 가만히 보니 한부모가족에서자란 자식들은 명절을 쓸쓸히 지냅니다. 누구도 반기지 않고 애 아빠을 보니 추석도 설도 우리 딸애 할머니 혼자서 제사을 간다고가더라구요. 

우리집에서는 제사을 지낼때 저의 딸도 옷을 말끔히 입고 제사상에 절을 합니다. 저는 절을 안합니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제사음식만 하고 절을 한적이 없습니다. 여동생도 마찬가지고.. 

부디 우리 어머니가 외할아버지 제사상과 외할머니가 오르게 하시고 제사상에 마지막 절을 하고 이세상을 하직하는 복을 주시고 저희 딸도 증조외할아버지와 증조 외할머니 제사상에 절을 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첩들의 자식은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술집여자가 가정교육을  했을까요 본처인 양반집의 최씨문중의 아씨가 첩의 아들들을 교육했을까요? 첩의 자식들도 이제는 자식들을 키워봤으니 누구의 제사을 지내야 할까요? 

군사부일체라는 말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한 집안이 일어서는데는 모두의 인내와 화합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선암사에서 홀로 추석에 제사상을 받는 저의 외할머니와 600년 된 선암사의 매화꽃을 생각하며 ... 

오늘 아침에 피곤한 몸을 일으켜서우며 선병원 545호에 입원하신 어머니 김정자을위해 잣을 조금 넣고 야채죽을 쑤었습니다.  택시을 타고 선병원에 들어가 엘리베이터에서 오층을 누르니 안되더라구요. 보호자 신분증으로 앨리베이터의 층수에 대어야 그 오층에서 내리수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여동생에게 전화해서 잣이 들어간 야채죽을 여동생에게 건네주고 다시 택시을 타고 집으로 오니 딸은 수학과외을 간다고 쌜죽하네요. 

병원의 인포메이션은 그전에 어머니와 왔을때는 한글로만 되어있었는데 지금은 영어와 한글로 되어있고 인터네셔널 진료센터도 있어서 대전시의 의료관광프로그램이 시행되냐 생각도 되고 중국근로자들을 위해 중국어도 써야 할텐데 생각도 들었다. 

병원밖을 나와 메디컬센터 간판을 보니 선병원의 설립자는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했다고 쓰여져 있었다. 

여동생이 병실에서 어머니가 죽을 먹는 사진을 보내 왔네요. 아니 병원에 가서 검사만 받고 진료만 받는다고 하더니 왠 입원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면회가 안된다고 하니 정말 이상합니다. 여동생 말로는 3일 입원이라고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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