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방그랄데시에서 차한잔. 식사 한끼 했떤 그분들 편안한 노후되길
코로나위기에 따라 국가의 항구과 공항이 봉쇄대면서 공급맟차단과 원자재가격 상승등에 따라근로자들의불만이 고조되고 국가에 돈이 안돌자 스리랑카는 위기에 처해서 대통령이 바뀌고 IMF차관이 들어가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때 IMF.com에 접소하는데 방글라데시도 사정이 안좋았는지 IMF차관이 들어간다고 기사가 나와있었습니다.
서남아시아 공동체인 싸크에 문제가 있나 생각했지만 아이가 고등학생이라 식당에 다니면서 과외비등 먹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해서 시간도 많지 않아 더이상 국제 금융이나 국제기구, 미디어에 접속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잘먹어야 하고 잘 입어야 공부을 잘할수있습니다.애아빠가 죽고 부산의 애할머니는 별로 신경을 안써줍니다. 배우지 않은 분이라 아이의 교육에는 그다지 신경을 안쓰는 분 같습니다.
옆에 사는 친정에서는 초등학교까지는 신경을 써주었는데 중학교들어가서는 모두가 바쁘고큰남동생의 딸인 조카도 결혼을 하고 남자조카도 인천인가로 이혼한 자기 어머니 외가쪽으로 가더라구요.그다음 남동생인 딸도 결혼을하면서 위기을 겪었는데 애을 키워보면 알겟지요. 자기 엄아가 어떠한 입장에서 애을 갖었고 남동생에게 매달렸었는지..알면 남동생에게 잘할 것입니다. 막내 남동생의 아내는 10대후반에 애을 낳았습니다. 어느곳에서 일햇다고하면 아 이해는 할 것입니다.부모을 욕할 것입니다.그러니 우리나라 청소년도 보호하고 방그라데시의 자라나는 청소년도 보호하고 싶습니다..
아사드 게이트우너예센타의 해드말리인 사나훌라는 내가 그곳에 부임하고 나서 일년이 넘어서 자기가 사는 집으로 초대을 해서 가족사진을 찍어달라고 이야기 했고 자신의 15살 정도되는 아들을 보여주자 자랑스러워했습니다.나는 그들의 웃음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일하던 아사드게이트원예센타에서 일하는 무스타파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다고봅니다. 월급을 받으면 그주에 거의 없어져 처음에는 밥을 먹지만 나중에는 부리을 먹는다고 합니다. 무스타파가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몇백타카을 빌려주었는데 이 분이 갚았느지 안갚았는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나에게 누가 아프다고 이야기 해서 자기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곳에 가니 뱀부, 대나무을 짜게서 만든 집에 바람이 송송들어오는 집에 자식이 조망조망 한 것입니다. 자식이 여럿이더라구요. 그곳은 정부기관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었습니다.
여름이라서 그런지 피부병이 많았습니다. 여인네들이 허리에 나일론 사리을 끼우니 그자리가 토톨토돌합니다.약을 치료해주고 왔습니다. 그리고 몇주지나자 그지역의 수장격인 농업성 다이렉터의 운전사가 자기집으로 초대해 홍차을 마시며 이야기 하다가 왔습니다..
그리고 제 옆집에 짜그마가족은 제가 아플때 둘쩨 며느리가 비바인가 기바인가 밥을 해서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유에 넣어서 삶은 설타을 넣은 세마이,. 푸딩, 고로케드을 가끔식 만들어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식사에는 저을 초대한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집주인이 로드리고의 집에 전화가 있어서 가끔식 어머니가 이집으로 전화을 하셨습니다. 파퓨아뉴기니의 파견되어 있던 안순철씨도 이집에 전화을 해서 저와 통화을 했습니다.그러나 저을 식사초대한적은 없습니다. 둘째 며느리가 굉장히 삭삭했습니다. 아들 결혼식에도 그집에서 했는데도 초대을 않더라구요.큰아들은 월드비젼에 다녔구요. 맥주한박스을 면세카드로 사달라고 해서 사주기도 했습니다.
그집에 나중에 어떤 사람이 이사을 왔는데 여자꼬마애가 저의 집에는 노크을하고 놀다가기도 했어요. 나중에 애엄마와 이야기을 하니 쿠웨이트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여자였습니다.
우리가 내가 귀찮다고 멀리햇더라면 나는 UN로 못나갔을 것입니다.
아사트게이트에 오셔서 저을 집으로 초대해 주신 여자국회의원,옥상에 페이크통에 담긴 꽃과 화분에 담긴 꽃이 산재한 옥상공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세계은행에서 퇴직하시고 아사드게이트 원예센타에 가끔식 오셔서 이것 저것을 사가시더니 어느 날은 집으로 점심식사초대을 했습니다. 그분의 와이프되시는 머리가 히끗히끗한 부인은 정말 매력적이고 포근한 미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기을 정말 맛잇게 구워서 그날 정말 너무나 맛잇게 밥을 먹었습니다. 그분의 남편분은 별로 말이 없습니다. 밥을 먹고 차을 한잔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한국에 대해서 많이 묻지도 않고 그저 편안하게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은 중년의 여자분이 아파트 정원에 코코넛나무가 있는데 잘 자라지 않는다고 걱정을 하셧고 다시 오셔서는 나을 자신이 사는 허름한 아파트에 데려가서 아파트 건물앞에 심어진 나무을 보여주고 집안으로 들어가 차한잔을 했습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던 어느 노인을 인사시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퇴역해군 장군이라고 했습니다.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Daily star을 읽는데 치타콩, "쪼토그람에 우리나라 해군함이 들어왔다고 신문에 나왔습니다.
저는 상류층의 사람만 만난것이 아닙니다. 아사드게이트의 어느 말리가 자신의 집으로 초대 했습니다. 다카을 벗어난 시골인데 가니 밥준비을 딸이 하는것입니다. 물사정이 안좋았는지 감자을 갂아서는 근야 잘라서 냄비에 넣고 조리을 하더라구요. 그래도 밥을 맛있게 먹어주고 왓습니다.
초대을 받았을떼는 애들사는 집에는 그 나라는 동화책들이 발달이 안되고 서점이 많지 않아 뉴마켙에서 그냥 크레파스을 사다주기도 했어도 아사드 게이트원예센타에 무스타파집은 여러번 가면서 동화책도 사다주었습니다. 엔지오에서도 단색으로 간단한동화책이 나오는데 그책은 너무 얇아요.채식이 안되어있고요.
아사드게이트 원예센타에 찾아어는 각 엔지오, 공무원들, 가난한 사람들. 시골에 사는 사람들 초대하면 다 갔습니다. 어느 시골에 가다가는 다리에 사람이 있는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 너무나 아름답고 정겨워 보이는 시골의 사진도 만들었습니다.
또한 센타에는 카톡릭수녀도 찾아왔었는데 나중에는 친구가 되었고 다카시내에 한국수녀가 왓다고 하면 이분이 그 수녀가 사는 곳을 안내을 했습니다.그래서 수녀들이 그곳에서 어떻게 사는지 어떤점을 불편해하는 지 이야기을 들을 수있었습니다..
수녀님에 의하면 방그랄데시는 엔지오에서 유치원을 오년간 하면 국가에 바치고 자신들은 선생이나 후원밖에 못한다고 하더라구요.그래서 시슈하스피탈 어린이 병원도 미국에서 지원해서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운영이 잘되다가 국가에 운영권으르 넘기고 해마다 미국에서 자원동사의사보건팀이 와서 봉사을 하고 간다고 했습니다.수녀는 나중에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약을 주러 다녔습니다. 이병원에도 수녀가 같이 가자고 해서 이병원도 방문을 했습니다. 병원은 의사가 진료을 하고 처방전을 써주면 그약을 병원빡의 양철지붕같은 곳에 약국에서 약을 사다가 환자가 준비을 하고 있어야 의사가 진료나 치료을 해줍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수녀들이 약을 가져다 줌니다..
한국도 의사들의 진료숫가가 비싸고 주사을 놓는 수공비가 비쌌었습니다. 대전 중구 태평동에 가을이 찾아오면 감기 환자가 급증합니다.코을 질질 흘리던 애들도 가나마이신을 맞으면 즉방으로 해결됩니다. 우리 어려서는 감기에 약을 많이 안먹었습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집안에 연탄 난로을 피우고 큰주전자에 어머니가 감겁질과 여러가지을 넣어서 무지근하게 끊여지면 이 물을 설탕에 타서 먹었지요. 집안에는 거실에는 귤향기가 넘치고 그당시만해도 자장면집에 가면 중국집홀에 보리차향이 가득했어요
지금은 연탄난로을 사용하는 곳은 거의 없고 중국집도 탄방동에 태원은 자스민차을 서브 합니다. 대전시청에 왕중국집은 메밀차을 서브합니다. 그런데 코로나을 거쳐서 이왕 중국집이 없어져서 무척서운합니다.
자장면 한그릇에 칠천원인데 밝은 매장에서 자장면 한그릇을 시켜도 식당 종업원들이 친절하고 예의도 바릅니다. 음악도 은은하니 거부감도 없고 말입니다. 대전시청에 출입하는 어느 기자와 가끔가서 식사을 햇습니다. 따로 커피숍가지 않고 이런 저런이야기을 하게되었었지요.
방그라데시의 중국집은 분위기가 어두운데 서비스는 좋아서 식사을 하기전에 레몬을 띄운 따스한 물을
손님에게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손을 닦고 타월을 주면 물기을 제거합니다. 방그라데시는 손을 밥을 먹기에 이런 서비스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일반 방글라데시 식당을 가면 괜찮은 식당은 입구에 손을 닦는 세면대가 있습니다.
한국에 한식당은 외국인들이 와서 일을 하는데 아니 한국인도 일을 하는데 고객만족도 서비스가 부족합니다.값이 비싼 식당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방에는 외국어로 이야기하고 한국말이 어눌한 시골아줌마같은 외국인인듯한 분이 설겆이을 하고 저는 갂듯이 대하려고 노력합니다.그분들이 아니면 지금 한국식당이 돌아가지 않을것이라 생각이 들어서요. 한식당협회을 검색하니 연변한식협회인가가 인터넷상에서 나타납니다.
여러사정상 방글라데시에 접속을 하지 않고 부탄에도 접속을 못하고 방글라데시 후배도 못챙기고 시간이 흘러도 FACE Book을 통해서 지난 6월에 방그라데시에 KOICA 사업으로 나간다고 인사가 오고 가방과 함껮찍은 사진을 올리던 분이 연결되어 방글라사태도 알게되고 재가 도울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재한 방그랄데시 대사관에도 연락을 했는데 전화가 안됏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