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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구두를 신은 Feb 13. 2024

도보와봐줘붜

-창작 동화

아반녀병하바세베요뵤?


어느 날 우리 집에 날아온 비밀 편지. 글씨로 보아 삐뚤삐뚤한 것이 딱 내 나이였다. 물론 우리 엄마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나보다 어린 남자애들도 글씨가 단정한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나저나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 문장 끝에 물음표가 있는 것을 보아 뭔가 묻고 있는 것인데.     


드르륵 공동 현관문이 열리자 집을 나섰다.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입을 벌렸다. 차가운 눈이 입안보다 얼굴에 더 많이 쏟아졌다. 눈송이들이 장난꾸러기 같다. 아주 작은 눈고양이가 차가운 발로 툭, 툭, 얼굴을 치는 것 같다.

‘늦었다. 학원 차 기사님이 또 뭐라 하시겠네.’

콩콩 뛰어가는데 미끄덩, 미끄덩, 넘어질 것 같다. 나는 위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4층 우리 집 거실 창문에 딱 붙어서 내가 가는 모양을 보고 있다. 보나 마나 지금쯤 쯧쯧쯧 혀를 차고 있겠지.

‘어이구, 내가 그렇게 일찍 나서라고 말했구먼. 뭉그적거리다가 급하다고 뛰네. 뛰다가 넘어져서 다리나 팔이 다치면 어쩌려고’

거실에서 엄마가 하는 소리가 블루투스 이어폰을 연결해 놓은 것처럼 울린다. 나는 힐끔 4층을 바라보고 그대로 달렸다. 얼핏 4층 이웃집 창문에서도 누군가 내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나는 머리에 쌓인 눈을 강아지처럼 떨면서 학원에 들어섰다.

“와, 경초코! 선생님 만나려고 이 눈발을 헤치고 온 거야? 선생님 가슴이 터지려고 해. 나 너무 행복해서 오늘 수업은 휴강하고 싶다만, 엄마에게 받은 돈이 있어서 양심껏 수업을 해야 쓰겠다. 여기 왕자님 자리에 앉아라.”

우리 잘생긴 학원 선생님은 나의 최애 인물이다. 나는 선생님처럼 너그러운 사람이 될 거다.

선생님은 나를 경초코라 부른다. 내 이름은 경원이인데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 수 없다. 한 번은 “왜 저를 초코라고 부르세요?”라고 물으니 초콜릿처럼 달콤하게 생겼다고 한다. 초콜릿 색깔이 초점인지(왜냐하면, 내가 까무잡잡하니까), 아니면 달콤한 것이 초점인지 모르겠다. 어떨 때는 경초코 대신 경쭈쭈바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초콜릿쭈쭈바를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뭐, 그 뜻이 어떻든지 나는 선생님 표정을 보면 안다. 나를 예뻐해서 그런다는 것을. 선생님이 우리 엄마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 우리 학원선생님은 여자분이다. 그러나 딱 봤을 때는 성별을 알 수가 없다. 우선 머리는 누가 봐도 남자 머리다. 여름에는 투블록으로 옆머리를 바짝 밀고, 겨울에는 그래도 좀 얌전하게 구레나룻을 남기고 귀를 동그랗게 파 올린 짧은 머리이다. 몸매는 여자라고 볼 수 없는 평평한 몸매이다. 죄송… 날씬한 몸매이다. 목소리는 오랫동안 수업을 해서 그런지 조금 쉰 목소리인데 남자아이 같다. 나는 남자인 듯 여자인 듯한 선생님의 그 목소리 때문에 이 학원에 계속 다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 이거 보세요. 오늘 우리 집 현관 앞에 떨어져 있던 건데요. 굉장히 수상하지 않아요?”    

 

아반녀병하바세베요뵤?   


내가 살고 있는 4층에는 두 집이 나란히 있고 그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있다. 정확히는 그 엘리베이터 앞에 이것이 있었다. 쪽지에는 그 한 줄뿐이었다.  

“무슨 뜻일까요?”

선생님은 수학 문제를 푸는 표정으로 문장을 뚫어지게 보셨다.

“아녀하세요.”

“네?”

“봐. 두 개가 모음을 반복하고 있잖아. 말을 더듬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두 번째 글자는 별 의미 없이 반복한 거야. 그냥 ㅂ을 더해서 더듬는 거라고 보면 돼. 문제는 받침을 뒷글자로 넘겼네! 그것만 앞글자로 가져오면 돼.”

선생님은 원리를 종이에 적었다.      


안 = 아바ㄴ

녕 = 녀벼ㅇ     


“와! '안녕하세요'구나.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안경을 이 암호문으로 바꾸면…”     

안경=아반겨병

“그렇지. 이건 뭘까?”

“커범퓨뷰터버? 컴퓨터!”

선생님과 나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마치 이해 못 했던 문제를 풀었을 때처럼.

“와,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큰일 났다. 빨리 공부하자.”     

‘누가 나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일까?’

생각은 그 쪽지를 보낸 사람에게 온통 쏠렸지만 애써 수학 문제에 집중하려고 했다.

‘만약 정말 할 말이 있다면 나에게 다시 보내겠지.’


“띵동, 4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친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쪽지가 있었다.


도보와봐줘붜


‘도와줘!’

가슴이 쿵 했다. 그렇다. 누군가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 나랑 비슷한 나이이고 암호문장을 내보내도 좋은지 확신이 서지 않아 처음에는 평범한 문장을 내보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나는 옆집을 의심했다.

“엄마, 옆집에는 누구누구 살지?”

“옆집?”

엄마는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할아버지만 사시는 것 같던데? 개도 한 마리 기르는 것 같고. 어떨 때 보면 개가 우악스럽게 짖더라.”

그제야 할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났다. 하얀 머리에 체구가 커다란 할아버지. 마주칠 때마다 그의 손에는 편의점에 다녀온 듯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는데 거기에는 늘 소주 한 병이 들어있었다.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지워진 백지 같은 표정. 나와 눈을 마주칠 때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표정. 인사를 거부하는 것 같은 표정.

“그럼, 가끔 손자 손녀라도 찾아오나?”

“몰라. 못 봤어.”     


초인종을 한 번 눌러볼까? 나는 그 집 앞을 서성였다. 그리고 현관문에 귀를 대고 소리도 들어보았다.

‘들린다!’

집 안에서는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윽고 개 짖는 소리가 그 소리를 가로막았다.

‘저 애가 보낸 게 틀림없어. 저 애가 도움이 필요한 거야!’

나는 집으로 들어와서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포도 두 송이를 꺼내 접시에 담았다.

띵동

옆집 초인종을 눌렀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누를까 고민하고 있을 때 띠리릭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할아버지였다. 나는 할아버지가 미처 가리지 못한 틈으로 집안을 살피려고 했다.

“안녕하세요. 포도 좀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시골에서 많이 올라왔거든요.”

거짓말을 하면 왜 땀이 나는 걸까, 이마에서 주르륵 땀이 흘렀다. 한 겨울에 시골에서 포도가 올라온다니 누가 봐도 거짓인 게 뻔하다. 나는 포도 접시 바닥에 쪽지를 붙여두어서 더 긴장했다.

‘제발 그 애가 봐야 할 텐데.’     


도보우붐이비 피빌요뵤하바니비?

혀변과봔무분 비비미빌버번호보느븐?     


나는 다른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자전거를 고치는 척하면서 현관문 밖 복도에서 상황을 지켜봤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띠리릭, 그 집 문이 열렸고 할아버지가 집에서 입는 옷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편의점에 가는 것이리라. 길어야 15분이다. 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어 스톱워치를 켰다. 할아버지는 정확히 13분 뒤에 도착했다. 만약, 그 애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준다면 나는 13분 안에 그 애에게 접근해야 한다.     

나는 옆집 현관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를까? 그때 현관문 밑으로 쪽지가 튀어나왔다. 두 집의 중간 정도까지. 어찌나 날쌔게 날아오는지 날리는 것을 오랫동안 연습한 것 같았다.     


무분 비비버번 Y  Y  YYY   ΛY     


나는 학원으로 달려갔다. 선생님은 시험지 채점을 하고 계셨다.

“응?”

선생님은 채점을 하다 말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오늘 경초코 오는 날 아닌데?”

나는 죄송하지만 한 번 더 봐주실 수 있는지 묻고 쪽지를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선생님은 가만히 들여다보셨다.

“지난번 그 암호문이랑 관련 있는 거야?”

“네, 문 비번이라고 되어 있는 거 보니 뒤에 있는 게 현관문 비밀번호인 거 같아요.”

“현관문 비밀번호?”

선생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옆집에 바깥 출입을 전혀 하지 않는 아이가 있다는 것과 그 애가 도움을 요청한 사실을 알렸다. 매일 술을 사서 들어가는 할아버지에 대한 것도.

“아무래도 그 애가 갇혀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비밀번호를 푸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되는지 확신이 안 서 경원아.”

선생님은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내 이름을 바르게 불렀다.

“그럼 어떻게 해요? 저는 그 집에 있는 물건 아무것도 손대지 않을 거예요. 그냥 그 애가 어떤지 보고만 나올 거예요. 그 애가 비밀번호를 알려준 거니까 초대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 제발 풀어주세요.”

선생님은 한숨을 쉬더니 말해주었다.

“이건 아주 옛날 사람들이 쓰던 숫자 표기와 비슷한데. 이 Y표시 하나가 1이라고 보면 돼. 뒤집힌 브이(Λ)는 상황상 5일 것 같고. 그러니까 비밀번호는 1136이야.”

나는 설명을 듣자마자 바로 이해되었다.


‘할아버지는 보니 매일 오후 1시 정도에 집 밖을 나가는 것 같아.’     

다음날 1시 정도에 나는 우리 집 문을 열어놓은 채 현관에 서 있었다. 띠리릭, 소리가 들렸다. ‘1층, 문이 닫힙니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숫자 다섯을 세고 조심조심 나갔다. 옆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리릭, 문이 열렸다.     

남자아이가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나보다 한두 살 적을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동갑인데 키가 작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 애는 기다렸다는 듯이 놀라지도 않고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갇혀 지냈다고 보기에는 말끔한 차림새였다. 다만 머리카락이 6개월은 자르지 않은 듯 커트 머리가 그대로 길게 자란 모습이었다.

“안녕. 나는 경원이라고 해. 옆집 살아. 네가 비밀번호 알려준 거야?”

“응”

나는 핸드폰 타이머를 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3분? 그렇다면 10분 안에 다시 이 집을 나가야 한다.

“네가 도와달라고 한 거야?”

“응”

“갇혀있는 거야? 할아버지가 너를 못 나가게 하셔?”

나는 마음이 조급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벌써 고민이 되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경찰에 신고하면 될까? 할아버지가 잡혀가면 이 아이는 누가 돌보고?’

이런 생각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아이는 침착하게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할아버지야.”

나는 갑자기 마음이 한숨 놓였다. 할아버지?

“너도 봤지? 할아버지 매일 술 사 오시는 거? 엄마 아빠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랑 나랑 둘만 남게 됐어. 나는 사고로 다리가 불편해졌고. 할아버지는 나 때문에 죽지도 못하는 거라고 하셨어. 매일 술 드시면서. 할아버지는 원래 그런 분 아니었는데. 예전에는 기자 생활도 하고 유명한 칼럼니스트였어. 그 사고가 할아버지를 완전히 바꿔놓았어. 할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 둘은 어느 날 함께 죽게 될지도 몰라.”

그때 타이머가 울렸다.

“나, 가봐야 해. 할아버지 오실 시간 됐어. 다시 올게.”

나는 후닥닥 문밖으로 나왔다. 우리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을 때 1층에서 누군가가 엘리베이터 타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할아버지와 바깥출입이 불가능한 아이. 바로 옆집에 이런 일이 있는 줄도 몰랐다니. 1년 전인가 엄마가 옆집에 살던 사람들이 인사도 없이 이사 간 것 같다고 했었는데 일이 그렇게 된 것이었다.     

누구한테 상의하는 게 좋을까? 왠지 엄마는 안 될 것 같았다. 엄마는 분명, 남의 일에 괜한 참견했다가 낭패를 볼 게 뻔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럴 시간에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하겠지. 그다음은 학원 선생님이 떠올랐는데 번번이 귀찮게 하는 게 민폐일 것 같았다. 그리고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그대로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을까? 아동학대 사유 중에 방치도 있다고 하는데. 맨날 술만 먹고 아이의 재활을 도와주지도 않으니까 아동학대 맞잖아.’

나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문제였다. 나는 할 수 없이 엄마에게 말을 했다.

“아휴, 끔찍해라. 이웃집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 젊은 부부가 이사한 줄 알았더니 그런 일이 있었어? 싹싹하고 인사성 바른 사람들이었는데. 아휴… 이웃 간에 사람이 죽어 나가도 모르다니 정말 사람 사는 곳이 아니구나. 할아버지가 그 부부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라니 몰랐네.”

엄마는 뜻밖에도 내 이야기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그리고 저녁에 아빠에게도 내게 들은 이야기를 하나도 빼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이전 이야기도 했다. 아빠랑 엄마는 진지하게 그 집에 대해 상의했다. 다음날 엄마는 친하게 지내는 502호 아줌마랑 301호 아줌마랑 계획을 짜서 그 집에 접근했다. 행복센터의 복지사하고도 연락하여 상담 치료를 시작했다고 한다. 엄마는 상황이 조금씩 진행될 때마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말했다.     


실개천에도 근린공원에도 벚꽃이 피었다. 토요일이 되어 엄마랑 아빠랑 산책하고 있는데 저 멀리에 할아버지가 수의 휠체어를 밀고 오는 게 보였다. 벚꽃이 휘리릭 날리고 할아버지도 슬픔을 한 움큼 날려버린 듯 가벼워 보였다. 엄마와 아빠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는 민수에게 손을 흔들었다. 민수도 나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가 재활에 들어가 제법 걸을 수도 있는데 오늘은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고,  학교에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1년이나 늦었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 옆에서 엄마가 해맑게 웃었다. 잘하셨다고, 멋지다고, 손자가 똑똑하니 적응하고 말고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나는 생각했다. 그 암호문은 닫힌 이웃집 문을 연 것이 아니라 엄마 마음의 문을 연 것이 아닐까. 아니, 내 마음의 문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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