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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구두를 신은 Feb 13. 2024

도보와봐줘붜

-창작 동화

어느 날 우리 집에 날아온 비밀 편지.      

아반녀병하바세베요뵤?     

삐뚤삐뚤한 글씨로 보아 딱 내 나이였다. 물론 우리 엄마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나보다 어린 남자애들도 글씨를 단정하게 쓰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나저나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 문장 끝에 물음표가 있는 것을 보아 뭔가 묻고 있는 것인데.     

드르륵 아파트 공동 현관문이 열렸다. 1층 주차장으로 나서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입을 벌렸다. 차가운 눈이 입안보다 얼굴에 더 많이 쏟아졌다. 눈송이들이 장난꾸러기 같다. 아주 작은 눈고양이가 차가운 발로 톡, 톡, 얼굴을 치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이 좋아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늦었다. 학원 차 기사님이 또 뭐라 하시겠네.’

콩콩 뛰어가는데 미끄덩, 미끄덩, 넘어질 것 같다. 나는 위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4층 우리 집 거실 창문에 딱 붙어서 내가 가는 모양을 보고 있다. 보나 마나 지금쯤 쯧쯧쯧 혀를 차고 있겠지.

‘어이구, 내가 그렇게 일찍 가라고 말했구만 뭉그적거리다가 급하다고 뛰네. 뛰다가 넘어져서 다치면 어쩌려고’

거실에서 엄마가 하는 소리가 블루투스 이어폰을 연결해놓은 것처럼 울린다. 나는 힐끔 4층을 바라보고 그대로 달렸다. 얼핏 4층 이웃집 창문에서도 누군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나는 머리에 쌓인 눈을 강아지처럼 털면서 학원에 들어섰다. 결국 학원 셔틀 버스를 놓친 나는 학원까지 눈을 맞으며 뛰어왔다.  

“와, 경초코! 선생님 만나려고 이 눈발을 헤치고 온 거야? 너무 기특해서 오늘 수업은 휴강하고 싶다만, 엄마에게 받은 돈이 있어서 양심껏 수업을 해야 쓰겠다. 여기에 앉아라.”

우리 잘생긴 학원 선생님은 나의 최애 인물이다. 선생님은 나를 경초코라 부른다. 내 이름은 경원이인데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 수 없다. 한 번은 “왜 저를 초코라고 부르세요?”라고 물으니 초콜릿처럼 달콤하게 생겼다고 한다. 초콜릿 색깔이 초점인지(왜냐하면, 내가 까무잡잡하니까), 아니면 달콤한 것이 초점인지 모르겠다. 어떨 때는 경초코 대신 경쭈쭈바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초콜릿 쭈쭈바를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뭐, 그 뜻이 어떻든지 나는 선생님 표정을 보면 안다. 나를 예뻐해서 그런다는 것을. 선생님이 우리 엄마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 우리 학원 선생님은 여자분이다. 목소리는 오랫동안 수업을 해서 그런지 조금 쉰 목소리인데 변성기 안 지난 남자아이 같다. 나는 남자인 듯 여자인 듯한 선생님의 그 목소리 때문에 이 학원에 계속 다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 이거 보세요. 오늘 우리 집 현관 앞에 떨어져 있던 건데요. 굉장히 수상하지 않아요?”     

아반녀병하바세베요뵤     

내가 살고 있는 4층에는 두 집이 나란히 있고 그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있다. 정확히는 그 엘리베이터 앞에 이것이 있었다. 쪽지에는 그 한 줄뿐이었다.  

“무슨 뜻일까요?”

선생님은 수학 문제를 푸는 표정으로 문장을 뚫어지게 보셨다.

“아녀하세요.”

“네?”

“봐. 두 개가 모음을 반복하고 있잖아. 말을 더듬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두 번째 글자는 별 의미 없이 반복한 거야. 그냥 ㅂ을 더해서 더듬는 거라고 보면 돼. 문제는 받침을 뒷글자로 넘겼네! 그것만 앞글자로 가져오면 돼.”

선생님은 원리를 종이에 적었다.      

안 = 아바ㄴ

녕 = 녀벼ㅇ     

“와!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안경을 이 암호문으로 바꾸면…아반…겨병!”

“그렇지. 이건 뭘까?”

“커범퓨뷰터버? 컴퓨터!”

선생님과 나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마치 이해 못 했던 문제를 풀었을 때처럼.

“와,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네? 큰일 났다. 빨리 공부하자.”     

‘누가 나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일까?’

생각은 그 쪽지를 보낸 사람에게 온통 쏠렸지만 애써 수학 문제에 집중하려고 했다. 

‘만약 정말 할 말이 있다면 다시 보내겠지.’     

“띵동, 4층입니다.”

도착을 알리는 엘리베이터의 안내를 들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바닥에 새로운 쪽지가 있었다. 아무 뜻 없이 버려진 듯한 네모난 종이.


 도보와봐줘붜     


‘도와줘!’

가슴이 쿵 했다. 그렇다. 누군가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시험 삼아 아까 그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편지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두 번째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옆집을 쳐다보았다. 나는 누가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당황하여 후닥닥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 엄마, 옆집에는 누구누구 살지?”

“옆집?”

엄마는 저녁 준비를 하느라 바쁜지 냉장고와 싱크대를 오가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할아버지만 사시는 것 같던데? 개도 한 마리 기르는 것 같고. 어떨 때 보면 개가 우악스럽게 짖더라.”

나는 그제야 할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났다. 부스스한 머리에 체구가 커다란 할아버지. 마주칠 때마다 그의 손에는 편의점에 다녀온 듯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는데 거기에는 늘 소주 한 병이 들어있었다.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지워진 백지 같은 표정. 나와 눈을 마주칠 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인사를 거부하는 것 같은 표정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다가 머쓱해진 게 여러 번이었다. 

“그럼, 가끔 손자 손녀라도 찾아오나?”

“몰라. 못 봤어.”     


다음날 나는 그 집 앞을 서성였다. 

‘초인종을 한 번 눌러볼까?’ 

현관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보았다. 

‘들린다!’ 

집 안에서는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곧이어 개 짖는 소리가 그 소리를 가로막았다. 

‘저 애가 보낸 게 틀림없어. 저 애가 도움이 필요한 거야!’

나는 집으로 들어와서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포도 두 송이를 꺼내 접시에 담았다. 엄마는 마침 마트에 가고 집에 없어서 절호의 기회였다. 

띵동

옆집 초인종을 누르는데 내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누를까 고민하고 있을 때 띠리릭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할아버지였다. 누워있었던지 그의 옆머리가 눌려있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미처 가리지 못한 틈으로 집안을 살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포도 좀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시골에서 많이 올라왔거든요.”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서 이웃집 아줌마들에게 나눠주던 게 생각이 나서 한 말이었다. 

‘아차! 한겨울에 시골에서 포도가 올라온다고 말해버렸네. 이런 엉터리 거짓말을 하다니…….’ 

팔은 오소소 추운데 등에서는 주르륵 땀이 흘렀다. 나는 포도 접시 바닥에 쪽지를 붙여두어서 더 긴장했던 것이다.

‘제발 그 애가 먼저 봐야 할 텐데.’     


도보우붐이비 피빌요뵤하바니비?

혀변과봔무분 비비미빌버번호보느븐?     


‘도움이 필요하니? 현관문 비밀번호는?’ 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는 다른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을 왔다갔다 하다가 자전거를 고치는 척하면서 현관문 밖 복도에서 상황을 지켜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 시간은 된 것 같았다. 차가워진 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동동거리던 내가 포기하고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그 집 문이 열렸고 할아버지가 집에서 입는 옷 그대로 외투도 안 입은 채 엘리베이터를 탔다. 나는 꾸벅 인사했는데, 할아버지는 처음 보는 아이인 것처럼 무표정했다. 편의점에 가는 것이리라. 길어야 15분이다. 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어 스톱워치를 켰다. 만약, 그 애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준다면 나는 할아버지가 편의점에 다녀오는 그 시간 안에 그 애에게 접근해야 한다.     

나는 옆집 현관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를까? 그때 현관문 밑으로 쪽지가 튀어나왔다. 어찌나 날쌔게 날아오는지 날리는 것을 오랫동안 연습한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쪽지를 주워들었다.      


무분 비비버번 Y  Y  YYY   ΛY                    


나는 얼른 쪽지를 숨기고 계단에 걸터앉아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정확히 13분 뒤에 도착했다. 

할아버지가 돌아온 시간을 확인한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숫자와 관련된 암호문들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문 비번이라고 되어 있는 거 보니 뒤에 있는 게 현관문 비밀번호인 거 같아.’

한참을 찾아 헤메고 있는데 은성이가 문자를 보내왔다.

‘너희 집에 놀러 가도 되냐?’

나는 빨리 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은성이는 쪽지를 뚫어지게 보더니 말했다.

“Y가 1에서 9 중에서 하나라는 건데… 아니 0도 있겠네”

은성이는 거기까지 이야기했는데 내 머릿속에서 번쩍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지! 여기 Y 세 개가 있는 게 있잖아. 세 개가 하나의 숫자를 가리킨다 치면! Y는 1, 2, 3 중에 하나네!”

은성이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만약 Y가 1이라면 YYY=3

만약 Y가 2라면 YYY=6

만약 Y가 3이라면 YYY=9

만약 Y가 4라면 YYY=12     

“그러니까 4부터는 안 되는 거지.”

은성이는 내 생각의 결정적인 단서를 본인이 제시했다는 것도 모르고 눈만 깜빡거리더니 말했다.

“오~ 좀 똑똑한 것 같은데. 그런데 뒤집힌 브이(Λ)는 뭘까? 알겠다! 뒤집힌 브이(Λ)는 5일 것 같지 않아?”

“그래 맞는 것 같다! 그럼…”

나는 다시 Y에 대해 따져보았다.     

만약 Y가 1이라면 ΛY = 6

만약 Y가 2이라면 ΛY = 7

만약 Y가 3이라면 ΛY = 8     

내가 연필로 삐뚤삐뚤 쓰고 있을 때 은성이가 말했다.

“Y는 그냥 1일 것 같아.”

“왜?”

내가 묻자 은성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몰라. 그냥.”

은성이는 신기한 아이다. 논리는 없지만 항상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나에게 준다. 생각해보니 은성이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고대 사람들은 숫자 표시를 몇 개만 만들어서 썼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가장 기본이 되는 수를 쓰는 게 맞다. 그건 바로 1….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이건 아주 옛날 바빌론이라는 나라에서 쓰던 숫자 표기와 비슷한데 이 Y표시 하나가 1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러니까 비밀번호는 1136이야.”

은성이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도 손바닥을 내밀어 가볍게 부딪쳤다. 

“그런데 이게 뭔데?”

나는 은성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소리를 죽여 대답했다. 

“옆집 현관문 비밀번호”

은성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옆집에 바깥 출입을 전혀 하지 않는 아이가 있다는 것과 그 애가 도움을 요청한 사실을 알렸다. 매일 술을 사서 들어가는 할아버지에 대한 것도. 

“아무래도 그 애가 갇혀있는 것 같아.” 

은성이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남의 집 출입문을 막 열고 들어가도 되는지 확신이 안 서, 경원아.”

은성이는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에만 말 끝에 내 이름을 붙였다. 

“그럼 어떻게 해? 나는 그 집에 있는 물건 아무것도 손대지 않을 거야. 그냥 그 애가 어떤지 보고만 나올 거라고. 그 애가 비밀번호를 알려준 거니까 초대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은성이는 내 침대에 털썩 앉더니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는 보니 매일 오후 1시 정도에 집 밖을 나가는 것 같아.”     


다음날 12시에 은성이가 다시 찾아왔다. 12시 30분이 되자 나는 우리 집 문을 열어놓은 채 현관에 서 있었다. 옆집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1층, 문이 닫힙니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숫자 다섯을 세고 조심조심 나갔다. 옆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1, 1, 3, 6 번호를 누를 때마다 소리가 귓속을 강하게 울렸고 심장도 따라 쿵쿵쿵쿵 울렸다.      

띠리릭     

문이 열렸다. 겁에 질려 우리 집에서 나오지 못했던 은성이도 그제서야 나왔다.      

나보다 한두 살 적을 것 같은 남자아이가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어쩌면 나랑 같은 5학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것은 그 애의 침착한 태도에서 받은 느낌 때문이었다. 그 애는 기다렸다는 듯이 놀라지도 않고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갇혀 지냈다고 보기에는 말끔한 차림새였다. 다만 머리카락이 6개월은 자르지 않은 듯 길게 자라 어깨에 닿아 있었다.  

“아, 안녕. 나는 경원이라고 해. 옆집 살아. 얘는 은성이, 내 친구.”

은성이랑 나는 어색하게 인사한 후 바로 물었다. 

“네가 비밀번호 알려준 거야?”

“응”

나는 화들짝 놀라서 핸드폰 타이머를 켰다. 시간을 재야 한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생각났기 때문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데 3분 정도 걸렸다 친다면 10분 안에 다시 이 집을 나가야 한다.

“네가 도와달라고 한 거야?”

“응”

“갇혀있는 거야? 할아버지가 너를 못 나가게 하셔?”

나는 마음이 급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벌써 고민이 되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경찰에 신고하면 될까? 할아버지가 잡혀가면 이 아이는 누가 돌보고?’

이런 생각도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짧은 사이에 머릿속에서 잡혀가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혼자 남은 아이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지나갔다.     

아이는 침착하게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할아버지야. 너도 봤지? 할아버지 매일 술 사 오시는 거? 엄마 아빠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랑 나랑 둘만 남게 됐어. 나는 사고로 다리가 불편해졌고. 할아버지는 나 때문에 죽지도 못하는 거라고 하셨어. 매일 술 드시면서. 할아버지는 원래 그런 분 아니었는데. 예전에는 기자 생활도 하고 유명한 칼럼니스트였어. 그 사고가 할아버지를 완전히 바꿔놓았어. 할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 둘은 어느 날 함께 죽게 될지도 몰라.”

생각해보니 할아버지는 맨날 술만 먹는 사람 치고는 뭔가 알 수 없는 진지함이 묻어있었다. 건장한 체구에는 한평생 유지해온 기품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았다. 타이머가 울렸다.

“나, 가봐야 해. 할아버지 오실 시간 됐어. 다시 올게.”

은성이와 나는 후닥닥 문밖으로 나왔다. 우리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을 때 1층에서 누군가가 엘리베이터 타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할아버지와 바깥출입이 불가능한 아이, 바로 옆집에 이런 일이 있는 줄도 몰랐다니. 1년 전인가 엄마가 옆집에 살던 사람들이 인사도 없이 이사 간 것 같다고 했었는데 일이 그렇게 된 것이었다.      

누구한테 상의하는 게 좋을까? 왠지 엄마는 안 될 것 같았다. 엄마는 분명히 남의 일에 괜한 참견했다가 낭패를 볼 게 뻔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럴 시간에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하겠지. 그다음은 학원 선생님이 떠올랐는데 귀찮게 하는 게 민폐일 것 같았다. 그리고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둘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문제였다. 은성이와 나는 생각에 잠겨 엄마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를 따라오며 엄마가 뭐라고 말했는데 나는 대꾸도 안 하고 그대로 들어갔던 것이다. 엄마가 빼꼼히 방문을 열고 나를 바라보다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문을 살며시 닫았다. 

은성이가 말했다. 

“그냥 그대로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을까? 아동학대 중에 방치도 있다고 하는데. 맨날 술만 먹고 아이의 재활을 도와주지도 않으니까 아동학대 맞잖아.”

나는 왜 그런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은성이와 나는 난생 처음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내가 겪은 고민이라고는 재작년에 어떤 여자애를 좋아했던 게 다였다. 은성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은성이는 전화를 받더니 엄마가 찾는다며 집으로 가버렸다. 나는 침대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경원아, 엄마 들어가도 돼?”

맨날 문을 벌컥벌컥 열고 잔소리 폭격을 하던 엄마가 갑자기 왜 내 눈치를 보는지 모르겠다.

“경원이 어디 아파? 목요일에 눈 많이 맞았어?”

엄마는 갑자기 내 이마를 만졌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열이 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차가운 복도에서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이다. 


다음날 학교에서 은성이를 만났다. 

“어떻게 됐어?”

“아무일도 못했어. 괜히 섣부르게 행동했다가 일을 망칠 것 같아서.”

“그렇지.”

은성이도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은성아”

“응?”

“혹시 이런 방법 어때? 암호문을 활용해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거야.”

“어떻게?”

나는 은성이와 집으로 갔다. 하얀 종이에 커다란 글씨로 쓰기 시작했다.

도보와봐줘붜

그리고 그 종이를 아파트 우편함에 모두 넣어두었다. 우리 동을 모두 넣으니 20장이 되었다. 그 밤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반송 우편함에 넣어놓은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그냥 우편함 위에 빼놓았다. 그러나 다음 날에는 조금 반응이 있었다. 몇몇 집에서 암호문에 대한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고 셋째 날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그 말이 ‘도와줘’라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그 뜻이 알려지면서 아파트는 분위기기 순식간에 뒤숭숭해졌다.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자 사람들은 다급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주 토요일이 되자 아파트 방송이 나왔다. 그 방송은 평소 안내 방송하던 AI 목소리가 아니라 진짜 사람의 목소리였다.     

“최근 우리 아파트 우편함에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혹시 그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즉시 관리 사무소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은성이와 나는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하지만 관리사무소를 찾아가지는 않았다. 우리가 그 편지를 쓴 것을 아는 순간 어쩌면 꿀밤과 함께 장난 치지 말라는 호통을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에도 비밀 편지를 우편함에 넣었다.

‘비밀 편지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일 저녁 6시 402호로 와주세요.’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은 엄마였다. 그건 우리 집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사람들을 집에 들어오게 허용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집을 청소하고 “간단한 다과라도 준비해야 할지”라고 중얼거리면서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모두들 놀랐다. 그날 처음 본 사람들도 있어서 서로 자기 소개를 하는 자리가 되어 버렸다.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화기애애해졌다.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은성이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며 준비한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 둘은 서로 말을 번갈아가면서 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비밀 편지를 보낸 사람은 바로 저희들입니다.”

제일 먼저 엄마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고 뒤이어 사람들도 뭔가 당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있을지 모를 비밀을 캐려는 듯 우리 가족의 얼굴을 둘러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빠는 잠시 엄마를 토닥토닥하면서 나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나는 처음에 이웃집 아이에게 받은 편지를 보여주었다.     

“사실 비밀 편지는 제가 받은 것입니다. 바로 옆집에서요.” 

나는 그동안의 일을 모두 전했다. 사람들은 우리 이야기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아휴, 끔찍해라. 이웃집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 젊은 부부가 이사한 줄 알았더니 그런 일이 있었어? 싹싹하고 인사성 바른 사람들이었는데.”

“이웃 간에 사람이 죽어 나가도 모르다니 정말 사람 사는 곳이 아니구나. 할아버지가 그 부부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라니 몰랐네. 민수가 옆집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니.”

엄마는 내가 본 남자아이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이전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진지하게 그 집에 대해 상의했다. 

다음날 엄마는 친하게 지내는 502호 아줌마랑 301호 아줌마랑 계획을 짜서 그 집을 방문했다. 행복센터의 복지사하고도 연락하여 상담 치료를 시작했다고 한다. 엄마는 상황이 조금씩 진행될 때마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말했다.     


어느덧 겨울이 지나고 실개천에도 근린공원에도 벚꽃이 피었다. 토요일이 되어 엄마랑 아빠랑 산책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민수의 휠체어를 밀고 오는 게 보였다. 벚꽃이 날리고 할아버지도 슬픔을 한 움큼 날려버린 듯 가벼워 보였다. 할아버지의 가벼운 발걸음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다. 엄마와 아빠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는 민수에게 손을 흔들었다. 민수도 나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가 재활에 들어가 제법 걸을 수도 있는데 오늘은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고, 이제 곧 학교에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1년이나 쉬었는데 괜찮을지 걱정된다고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 옆에서 엄마가 해맑게 웃었다. 잘하셨다고, 멋지다고, 손자가 똑똑하니 적응하고 말고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며칠 후면 나는 6학년이 된다. 그리고 민수는 5학년. 나는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 아빠를 보며 마음이 봄 햇살처럼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암호문은 닫힌 이웃집 문을 연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 마음의 문을 연 것이 아닐까. 아니, 내 마음의 문인가? (끝)  59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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