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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구두를 신은 Jul 07. 2024

[소설] 축대 위 하얀 찔레꽃 1,2화

1화 고백 아니 제안  

   

“넌, 좀 천박해.”

“천박? 야, 내가 알고 있는 그 단어 맞아? 얕을 천, 엷을 박? 학문이나 생각이 얕거나 말과 행동이 상스러움 이거?”

성우가 물었다. 그러자 주현이가 말했다. 상대에게 독설을 날리고도 일말의 미안함도 없이.

“응, 맞아.”

성우는 잠시 어지러웠다. 이런 독설은 싸울 때나 하는 말 아닌가? 성우는 같은 반 성주현이라는 여자아이와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다. 불과 30초 전에 고백을 했다. 그 고백이란 것이 가슴 설레는, 미묘한 떨림이 수반된 것이 아니라 좀 사업 제안 같은 느낌이긴 했다. 사업 파트너를 제안하는 느낌으로.

“우리 사귀어 볼까?”

제삼자가 보기에도 성우와 주현은 잘 어울리긴 했다. 외모로 친다면 성우는 잘 생긴 편은 아니다. 눈이 좀 기름한 편인데 크진 않고, 얼굴은 하얀 편이긴 하지만 아직 여드름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도 슬림한 몸매에 깔끔한 옷차림과 잘 정돈된 머리, 그리고 자신만만한 표정 때문에 못생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주현은 아름답다. 이제 열여덟이니 완성된 미모는 아니나 화려하게 피어날 것이 분명하다. 이 둘을 어울린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학급 내에서 가지는 이미지 때문이다. 둘은 성적이 1, 2등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다. 이런 객관적인 입장에서의 어울림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라 함은 객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인 감성이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성우는 주현의 흠잡을 데 없이 고운 자태와 언행이 마음에 든다는 것, 그런 주현에게 자신이 밀리지 않는다는 객관적인 판단하에 고백 아닌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주현은 웃지도 않고 애매한 표정으로 땅을 보고, 버스가 오고 있는지 고개를 한 번 기웃하고는 대답했다.

“싫어.”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누구를 사귀어본 적 없는 풋내기니까.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나처럼 응? 괜찮은 남자가 싫은 이유가 뭔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질문했을 때 들었던 답이 바로 이것이었다.

“넌, 좀, 천박해.”

상상 범위를 넘어선 대답이었다. 예를 들어 잘난 척이 심하다든지(왜냐하면 종종 그러니까. 전 과목 1등급이 찍힌 성적표를 담임선생님에게 받아서 제 자리로 돌아올 때 성우는 늘 아이들 보라는 듯이 성적표를 펼쳐 들며 노래를 불러젖혔다. 위풍당당 행진곡. 성적으로 가뜩이나 예민해진 아이들은 그런 성우를 눈꼴시어했다.), 너무 나댄다든지(이건 잘난 척과 조금 다른 면이니까.), 싸가지가 없다든지(음악 선생에게 하는 꼬락서니를 다 보았을 테니), 무리 지어 다닌다든지(유유상종이다. 있어 보이는 애들과 공부 잘하는 애들, 몸 관리를 잘하는 애들과 어울린다. 안 그런 애들을 혐오한다.) 한다면 다 이해하겠다. 그런데 뭐, 천박하다고? 하긴 성우의 이런 면들을 ‘천박’이라는 단어에 욱여넣는다면 할 말이 없다.

순간, 버스가 눈앞에 섰다.

“말을 그따위로 한다 이거지? 송주현? 쳇! 잘 가라”

버스 정류장에 서는 대부분의 버스가 집으로 가는 것이라 성우는 버스에 후닥닥 올라탔다. 사람들이 뒤이어 우르르 오르고, 버스가 출발하려고 할 때, 갑자기 뒷문이 열렸다. 성우가 다시 내렸다.

“야, 하나만 물어보자.”

주현은 마치 누군가가 영어 해석 문제를 물었을 때처럼 평온하게 성우를 바라보았다. 주현은 수학 문제를 물을 때는 살짝 눈썹에 힘을 준다. 수학이란, 어떨 때는 답이 나오기도 하나 어떨 때는 답이 구해지지 않아 애를 먹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성우는 수학 문제를 물을 때면 눈이 빛난다.

‘오호, 어떤 재미있는 문제인가 보자.’

그러나 성우는 영어 해석 문제랄지 문법 문제를 묻는다면 살짝, 귀찮아하며 주현이에게 미루고는 했다. 하여튼 주현이의 그 평온한 표정을 보면서 성우는 생각했다.

‘내 질문에 긴장감이 전혀 없네?’

“그럼, 좋아하는 애는 있어?”

주현이 말했다.

“없어.”

“그럼 어떤 스타일이 천박하지 않은 건데? 우리 반에서 고르라면 말이야.”

“우리 반에서 고르라면....”

주현은 차근히 영어 문장을 읽듯이 자신의 마음을 읽어내고 있다. 그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신재영 정도?”

성우는 기가 탁 막혔다.

‘전교 회장인 현수도 아니고, 길쭉하고 멋지게 생긴 학급 회장 진혁이도 아니고, 운동 잘하는 몸짱 용수도 아니고 고작 신재영?’

신재영은 성우의 무리에 도저히 낄 수 없는 아이다. 성우에게 남자 녀석들은 세 무리다. 성우네 무리이거나, 성우네 보다는 좀 딸리는 용수네 무리, 그리고 나머지. 성우네 무리는 다 되는 애들. 집도 웬만큼 살고, 학원과 과외로 지속적인 관계가 이어져 있고, 공부도 운동도, 그리고 문화적인 식견도 비슷한 아이들이다. 메이저리그다. 용수네는 공부는 뒷전이고 운동에 진심인 애들로 스포츠클럽 대회나 체육 시간, 점심시간을 학교 생활의 핵심으로 여기는 애들이다. 용수네와 성우네는 평소에는 좀 거리를 두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연합전선을 펼 수 있는 공통점이 있는 애들이다. 이 두 무리에 끼지 않는 소수의 아이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재영이다. 그렇다고 재영이 왕따냐, 그렇게 볼 수는 없다. 그냥 그림자처럼 있는 아이이다. 성우 보기에는 그랬다. 보통 그렇게 무리에서 떨어진 아이들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해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거나 아니면 기죽은 상태로 있게 마련인데 재영은 혼자 있을 때도 자연스러웠고 두세 사람과 어울릴 때도 있었다. 나리였던가 나래였던가? 그 애도 뭔가 재영이랑 결이 비슷하게 조용했다.

‘신재영이 좋다고? 이제 보니 사람 보는 눈이 수준 미달이네.’       

   

2화 음악 시간


젠장

성우의 하루 루틴의 시작은 이것이다. 알람 소리에 잠이 깨어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볼일을 보고 난 후 칫솔을 입에 물면서 동시에 입에서 이 말을 내뱉는다. 딱히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욕설을 해야, 성우는 삶에 용기가 난다.

가끔은 그 욕설의 대상이 명백해지는 순간도 있다. 오늘처럼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협박했던 음악 선생.

음악 시간에 성우가 크게 잘못한 것은 없었다. 대부분의 남자 녀석들이 자리에 앉지 않고 떠들고 있었다. 음악 선생이 몇 번 신경질을 내자 뭉그적거리며 아이들이 자리에 앉고 있었고 성우는 조금 더 늦었을 뿐이다. 그리고 낄낄거리고 웃었던 것뿐이다.

“진성우! 너, 뭐 믿고 그렇게 까불어? 공부 잘하는 게 무슨 벼슬이야? 너 그딴 식으로 하면 나라고 방법이 없을 것 같아?”

“그 방법이라는 게 뭔데요?”

그 방법이라는 게 들어보니 정말 재수가 없는 이야기다. 뭐냐 하면 생기부에 이렇게 쓰겠다고 했다.      

이 학생은 성적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음악 수업에 전혀 참여하지 않음. 교사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부족하며 학생들을 선동하여 수업을 방해함.      

미사여구로 빽빽한 생기부 교과 세특(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사이에 이런 난감한 표현이 섞여 있다면 대학 교수들은 성우의 생기부를 던져버릴 것이 분명하다. 교사라는 사람이 그딴 식으로 학생을 협박한다는 게 정말 더럽고 치사해서 성우도 한 마디 했던 것이다.     

시발     

‘시발 사건’은 발 빠르게 전교에 퍼져나갔고, 사태는 이해심과 인내심이라는 쌍권총을 장착한 담임의 중재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성우는 담임을 잘 만났다. 담임 선생님은 음악 선생보다 10년은 더 나이가 많아 보인다.

“내가 너였어도 열받았을 거 같아. 네 마음 이해해. 그래도 선생님한테 ‘시발’은 아니지. 느낀 그대로 다 말하면 되니?”

아닌 게 아니라 담임선생님의 말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사과할 마음이 났다. 사과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래도 그 마음이 났다는 게 성우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덜 굴욕적이니까.

담임선생님은 음악 선생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했을 것이다. 당연히 열받으셨겠죠, 선생님 마음 이해해요. 그래도 ‘생기부’로 협박하는 것은 좀 아니죠, 했을 것이다. 노련하게. 이런 일을 작년에 겪었다면 대뜸 부모님 소환부터 이루어졌을 텐데. 담임선생님은 이 모든 사건을 부모님도 모르게 처리했다.     

담임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샘, 안녕하세요.”

“응, 안녕”

어제의 다정한 모습에 비하면 다소 시큰둥한 반응이다. 조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담임을 따라가면서 성우는 말했다.

“아, 제가 어제는 진짜 정신이 어떻게 됐나 봐요.”

“그렇지? 그게 성우 아니지?”

“그럼요.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하지. 그 말 믿는다.”

“옛썰!”

성우는 멋진 자세로 경례를 부친다. 오케이, 여기까지. 성우도 담임도 서로 눈치 안 채게 한숨을 쉰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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