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의 장소뿐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라는 표현보다는 인연이라는 표현이 사실 좀 더 적당할 것 같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인연들은 나에게 과분할 만큼 좋은 영향을 주곤 했다.
말 한 번 해보지 않아도 그들의 삶의 방식, 그들의 삶의 모습 만으로도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었던 기억들. "나 다운 삶 찾기"에 집착했던 이번 여행만큼이나 만나는 사람들,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1. 독채펜션 이야기
고성 쪽에 꽤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독채 펜션을 예약해 두었다.
예약하기 전 고즈넉하면서, 숙소 안에서도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들로 몇 가지 후보를 추렸었다.
그중 어두운 색감의 원목 인테리어와 자연과의 조화가 멋스러웠던 이곳으로 예약을 했다.
새벽이슬을 맞이하는 집이란 뜻을 갖고 있는 숙소 이름에 걸맞게 울창한 소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사이로 다정한 햇빛, 바람이 비추는 걸 그대로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시간에 따라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그려내는 그림자가 달라졌고 멍하니 이를 보고 있으면 마치 잘 빚어놓은 공예작품을 보는 듯했다. 마치 내 기분이 차분히 위로받는 느낌이었을까.
특히 사장님께서 정성스럽게 준비해 주시는 저녁과 조식이 일품이라는 후기를 봤는데 다음날 아침에 먹었던 조식은 이것만으로도 이 공간을 다시 찾고 싶을 만큼 나에게는 너무나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따뜻하게 끓여진 누룽지와 적당한 온도의 국과 반찬들.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아무렇게나 골라 먹을 수 있는 조식보다 이 정성스러운 한 끼 식사가 나를 온전하게 대우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예전에는 이런 공간에 머무를 때면 그저 내가 온전히 쉬고 가는 느낌과 멋들어진 인테리어만 눈에 들어왔는 특히 이번 여행은 이러한 공간을 운영하는 사장님에 대한 호기심이 한가득 생겼다. 어쩌다 이렇게 소나무숲이 울창한 독채펜션을 운영하게 되셨을까. 원래 사장님도 직장생활을 하다가 본인만의 삶을 선택하신 걸까. 한가득 기분 좋은 마음을 안고 오는 여행객들을 매일 대하는 삶이란 어떤 걸까.
넉살이라도 좋으면 로비에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물어보러 갈 때 사장님께 물어보며 대화를 나눴겠지만 그냥 나 혼자만의 호기심과 관심으로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아 사장님에 대한 궁금증은 내 마음속에만 남겨 두었다.
그 공간에서 내어주던 보이차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집에도 보이차를 두고 가끔 차가 마시고 싶을 때마다 들이키곤 한다. 그러면 그때 그 공간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문 밖의 커다란 소나무 숲을 보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차를 통해 전해지는 차분한 환기가 참 좋더라.
2. 소품샵 이야기
강릉 시내에 나가면 귀엽고 아기자기한 카페와 소품샵들이 몰려있는 거리가 있다. 매번 강릉을 오면 나는 바닷가 근처에서 노느라 시내 쪽은 잘 안 둘러봤었다. 둘러봐도 뭐 그냥 유명하고 예쁜 카페 가는 정도였을 것이다.
근데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그 아기자기한 소품샵들을 구경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더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산을 양산 삼아 쓰고 열심히 그 거리를 왔다 갔다 했다. 소품샵들은 각자 사장님들의 개성과 취향에 맞게 다 다른 콘셉트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공간들을 기웃거리면서 그 가게에 묻어 있는 사장님들만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마치 작은 전시회에 온 것 같은 기분에 내적 호기심과 즐거움이 발동했다.
가게의 한쪽 안에 마련된 사장님들의 작업 공간을 곁눈질로 흘겨보는 재미도 있었는데 조금은 어수선해 보이는 듯한 책상과 작업 꾸러미들을 보며 마치 어린아이가 문구점을 구경하는 듯한 마음으로 히죽거리고 있었다. 안에서 뭘 만드시는 걸까. 이런 걸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이런 내 모습을 보니 갑자기 아 내가 그들의 삶을 동경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이름 모를 사장님들의 귀여운 판매용 소품들이 나에게는 예술 작품이었고, 영감을 주는 하나하나의 피사체였던 것이다.
유독 마음에 들었던 소품샵 두 곳을 네이버 지도 속 즐겨찾기로 저장해 두고 다음에 꼭 다시 들러보겠노라고 다짐했다. 동경의 대상이기만 했던 그들의 삶이 실제로 내가 걸어가는 방향이 된다면 그때 이 공간들을 다시 마주했을 때의 내 감정은 어떨까?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물론 내가 본 그들의 삶의 방식은 지극히나 미화되고 가려져 있는 이면 따위는 볼 수 없는 단편적인 모습에만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그저 궁금했고 그런 그들의 삶을 이런 식으로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새로운 용기를 주는 듯했다.
마치 검은색 연필만 쓸 줄 알던 내게 무지개색의 팔레트를 눈앞에 펼쳐 준 느낌이랄까. 나는 이제 닳아진 연필을 내려두고 팔레트에서 원하는 색을 골라서 나만의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여행의 마무리와 함께 나에게 큰 결심을 내릴 용기를 주었다.
3. 서울로 돌아오는 길
그렇게 나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팀장님께 연락을 드렸다. 내 마음의 결정은 이미 내려진 지 오래였고 그 결정을 내릴 구실과 계기가 필요해서 강릉으로 떠나온 것이었음이 이제는 분명해졌다. 내 마음의 결정이 난 이상 더 이상 이 여행의 마무리를 지체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나는 당장 내일 오전에, 그것도 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팀장님과 면담을 하기로 했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그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앞으로 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고 이 길이 맞는 걸까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다. 그래도 기분 좋은 마음으로 오지 않는 잠을 청했고 그날은 그렇게 양을 세다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