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과의 면담은 생각보다 짧게 끝났다.
이미 팀장님께 "할 말 있어요"라고 말씀드린 순간부터 직감하고 계셨다는 팀장님. "이미 그런 상황이고 마음의 결정 내렸다는데 내가 뭐 어쩌겠어 ~ "라고 생각보다 쿨하게 던지신 말에 나도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팀장님의 눈에는 나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과 아쉬움 두 가지 마음이 비쳐 보였다. 그런 팀장님을 보며 나 역시 죄송한 마음과 후련한 마음이 교차했다.
팀장님께 퇴사를 말씀드리며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 보니 정말 나에게는 좋은 리더였구나 싶은 생각과
이런 리더 밑에서 내 회사 생활의 마무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전에 내가 했던 퇴사들은 항상 명확한 이유가 존재했다. 다른 회사로의 이직, 더 나은 커리어를 위한 점프 업 등의 이유였다. 그랬기 때문에 퇴사면담을 할 때면 아쉬움보다는 후련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번 회사는 팀과 직무에 대한 만족감이 높았던 곳이었던 만큼 잘하고 싶었던 마음이 가득했기에 이런 결정을 전하면서도 마음이 참 많이 불편했다.
또한 팀장님과 사전에 이야기했던 기획 중인 프로젝트들도 있었기 때문에 내가 회사를 떠난다는 결정이 지금 속한 조직에서 내 책임감을 다하지 못하는 것만 같아서 불편한 마음도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차라리 내가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는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회사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내 마음이 덜 어렵지는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이 이렇게 무책임해도 되는 걸까 싶은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것이 나를 잠시 휘감았다.
#책임감이 높은 사람
나는 유달리 책임감이 높은 사람이었다. 이것이 조직생활을 하는데 장점이 되기도, 단점이 되기도 했는데 장점은 팀 업무에 있어서 최고의 팀플레이어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으로 팀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편이었으며 굳이 일의 경중을 따져본다면 중이 되는 일은 거의 다 내가
도맡아 하는 편이었다. 이것이 어떠한 문제를 일으켰냐 하면, 결국 팀플레이에는 무임승차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법. 그러한 무임승차자들의 무례하면서도 무책임한 태도들을 감내해 내는 데 온 에너지를 쏟으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팀 업무가 어떻게 되건, 본인의 맡는 일은 최소화하고자 하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었다. 타인에게 피해가 되건, 민폐를 주든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이러한 사람들을 이끌고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그들처럼 나도 타인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내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 피해 보는 것은 하지 않아 볼까 하던 시기도 있었다. 팀의 업무에서는 항상 최소한으로 소극적인 일만 하며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에는 여우처럼 달려들어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 애쓰던 시기. 하지만 나에게 맞지 않는 음식을 꾸역꾸역 먹어댄 것 마냥 체하기 일쑤였고, 결국 오래가지는 못했다.
하루에 9시간 이상을 보내는 회사생활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 나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 들로만 채워도 부족한데, 관계 속에서 오는 고민과 갈등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쏟는 에너지들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비효율적이었다. 특히나 관계 갈등이 가장 큰 스트레스 요소가 되는 나 같은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회사 생활이라는 게 하면 할수록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졌다.
위에서 말한 여우처럼 본인에게 득이 되는 것들만 잘 골라내 일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회사생활을 잘 해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그 능력이 없으니 고통받으면서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겠나 그게 나인걸.
지난 상담과 여행으로 인해 나는 이제 이런 나 스스로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고, 채찍질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고 인정해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맞는 길을 가기로 했다. 나의 높은 책임감이 장점으로만 발휘될 수 있는 영역에 투자하며, 사회적 관계 속에 쏟을 에너지들은 나의 다양한 작업 활동에 쏟기로 말이다.
지금까지 책임감 하나로 모든 일들을 견뎌냈던 내가
퇴사만큼은 최대한 가볍고 담백하게, 그리고 무책임하게 던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모양도 방향도 없는 새로운 공간에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