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표정한 하루 끝, 마음이 울렁이는 밤

나의 우울함에게

by 꿈꾸는 날들

그런 날이 있다.

세상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지구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만 같은 날.


매일 익숙하게 해 왔던 일이 꼬이고, 뭘 해도 안 되는 것만 같고 안 그래도 서러운데 가만히 있는 나를 자꾸만 여기저기서 복받치게 만드는 날. 그럴 땐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애쓰기보다, 온 힘을 다해 세상과 맞서 싸우겠다고 의지력을 불태우기보다, 그저 따뜻한 음식 한 그릇을 먹고 푹 자는 게 상책이었다.


우울함이 나를 온통 집어삼키는 하루.


때때로 어떤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들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런 날은 마음의 문제인 경우가 많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우울하다는 감정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울함은 아주 느리고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스며들어 인지할 겨를도 없이 마음을 바짝 시들어 버리게 만든다. 물 한 방울 없이 갈라져버린 밭처럼 마음에 쩍쩍 금이 간다. 누군가는 우울함을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하던데 그럼 마음도 콧물을 흘리거나 재채기라도 하면서 신호를 보내주면 얼마나 좋을까? 좀처럼 알아채기 힘든 마음의 상태는 늘 한걸음 늦게 깨닫게 되는 게 문제다.


종종 우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디서부터 왜 시작된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우울하다고 인지하는 순간부터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결코 우울함에게 지고 싶지가 않았다. 그 마음을 오래 품고 있으면 나도 시들어가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번져가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책임감일지도 모르지만 우울한 엄마가 되어 그늘진 아이들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런 나의 다짐은 되려 우울함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 돼주었다.


울적한 기분이 밀려오면 마음을 햇볕이 가장 좋은 자리에 옮겨놓는다. 우울함을 이겨내려 애쓰기보다 잘 흘려보낼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준.


일단 방안의 창문을 활짝 열고 공기를 순환시킨다. 방 안의 공기와 바깥의 공기가 적당히 섞일 수 있도록 해준 다음, 간단한 운동이나 청소를 시작한다. 잡다한 생각이 많거나 마음이 바닥에 들러붙을 때는 오히려 몸을 살짝 피곤할 정도로 움직여주는 게 좋다. 그리고 깨끗하게 샤워를 한 뒤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한숨 푹 잔다.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으면 평소에 좋아했던 노래 서너 곡을 찾아 듣거나, 무작정 집을 나서 산책을 한다. 자주 가는 서점에 들러서 새로 나온 책도 사고 예쁜 종이와 펜도 한아름 사 온다. 그리고 종이에 무언갈 끄적이며 흩어졌던 생각들을 차근차근 모았다 어디론가 흘려보내기도 하면서 마음을 다독인다.


우리의 뇌는 마음이 아플 때 몸이 아픈 것과 똑같이 인식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이 아플 땐 간단한 비타민을 먹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지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효능이 없는 약을 먹어도 괜찮아질 거라는 기대와 믿음이 병을 낫게 하는 플라시보 효과처럼 세상의 모든 아픔이 비타민 하나로도 괜찮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다 보면 누구나 하나쯤 갖게 되는 심연의 곪은 상처야 쉽사리 나을 수 없겠지만 가벼운 마음의 통증 정도는 쉽게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오래 가지고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으니.


단골 식당에 가서 맛있는 한 끼를 먹는다던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친구를 만난다던가, 그도 아니면 마음이 치유가 될만한 무언가를 해보는 것. 우리에겐 우울함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자가 처방전이 필요하다.


살다 보면 이 길의 모퉁이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오늘 해결된 일이 내일도 괜찮을 거란 보장도 없다.

하지만 우울한 감정에 오래 잠식 돼버리면 결코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오늘의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우울함은 최대한 빨리 보내주는 게 좋다.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 슬픔이 곪아가기 전에 마음의 면역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 우울함이 나에게 들러붙지 않고 스스로 떨어져 나갈 수 있도록. 가끔씩 우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마음에게 말한다. "애썼어. 잘했어. 괜찮아. 걱정하지 마." 움츠려 들다 못해 깊은 동굴로 숨어버리려는 마음 옆에 앉아 슬픔을 다독여준다. 조각난 마음들을 이어 붙이고, 무기력한 나를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써서 더 잘 먹이고 재우며 보살피다 보면 어느새 메말랐던 마음도 조금씩 생기를 되찾는다.

그렇게 나의 우울함에게 이별을 고한다.


세상이란 게 원래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거라면, 내 마음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면.

우울할 때 나를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뿐이라도 기꺼이 내 슬픔을 달래줄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최대한 햇볕 가까운 자리에 마음을 놓는다.

또다시 우울해지는 순간이 찾아와도, 마음을 다시 햇볕 옆으로 옮겨 놓으면 그만이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