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단단한 용기를 보태기
아주 오래전 일인데도 바로 어제처럼 또렷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전시회를 갔었고 아끼는 화가의 그림에 둘러싸여 달큰한 밤공기 마저 완벽했지만 한편으로 나의 가장 가난한 마음을 마주했던 순간. 물방울이 가득 그려진 그림 앞에서 마치 진짜 움직이는 것 같은 섬세한 표현력에 한참을 감탄하고 있었다. '딱 한 번만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삼키며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는데 갑자기 내 앞으로 친구의 손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너무 만져보고 싶잖아."
누가 볼까 조심스러워하면서도 결단 있는 행동을 한 친구의 얼굴에서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어떤 마음 하나가 반짝였다.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하는 일, 혹은 당연히 안될 거라고 생각하는 일 앞에서 나는 한 번도 그 선을 넘어 본 적이 없다. 옳고 그름의 도덕적 기준이 높아서라기보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성향 탓이었다. 행여나 내 앞에 그어진 선을 밟게 될까 봐 한참을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 끝을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사람. 그런 나는 결코 경험해 볼 수 없을 그 마음은 도대체 어떤 걸까? 살면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자유롭게 하는 재미를 아는 사람 옆에서 항상 단정하고 반듯하게만 살려고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느껴 볼 수 없는 어떤 쾌감 같은 것. 태어나 처음으로 나는 좀 불쌍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밤이었다.
"그렇게 사는 건 너무 숨 막히지 않아?"
교과서 같은 삶은 영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친구는 말했다. 정해진 선에서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아는 사람. 실패가 두려워 하루 종일 돌다리를 두들겨 보다 결국 시도조차 못해보는 사람.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보다 내가 불편을 감수하는 쪽이 마음 편하고, 나에게 맡겨진 책임이나 의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눈치를 보느라 늘 구석에 마음을 접어 놓고 사는 사람. 타고난 성향과 자라온 환경도 영향이 있겠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았던 나는 자꾸만 마음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경계선 안에 나를 가둬놓고 하고 싶은 것보다 하면 안 되는 일들을 더 자주 생각하며 살아왔다.
정도를 지키면 사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반듯하게만 살려고 하면 살아가는 동안 경험해 볼 수 있는 다양한 행복들을 놓쳐버리게 된다. 인생은 쓸데없는 기우를 내려놓고 즐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행복에 더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늘 정답만 선택할 수도 없고 최선의 길만 걸어갈 수도 없다. 때론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도 있고 한참을 헤매고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길이 더 빠른 길이 될 때도 있다. 어차피 인생이란 게 계획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인생이란 건 없으니까. 정해진 노선에서 가끔은 비뚤어지기도 하고 때론 어긋나기도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사는 일이 덜 고달파진다. 살짝 미쳐야 인생이 즐겁다는 말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법에 접촉되지 않는 선에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가벼운 마음은 오히려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 준다.
마음의 바운더리를 좁히고 안전하게 정해진 길로만 걸어가려고 한다면 인생의 모든 풍경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삶이 될지도 모른다. 반듯하게만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동안 결국은 후회로 남아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꾸역꾸역 참고 살아가는 마음에게 한 번쯤 다른 길로 가도 괜찮다고 가끔은 돌아가도 괜찮고, 늦어도 괜찮고, 포기해도 좋다고 말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실패하면 안 된다고, 정해진 선에서 벗어나면 큰일이라고, 그렇게 무작정 참고 버티는 것만이 답이라고 믿었던 그때의 나에게 그만해도 된다고, 조금 풀어지고 때론 망가져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었다면. 가끔은 그 선을 넘어가도 괜찮다고 용기를 보탰다면. 그렇게 마음을 좀 풀어놓고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잘할 수 있지? 수 틀리면 빠꾸! 아빠한테 냅다 뛰어와. 알았지?"
늘 직진만 해야 되는 줄 아는 인생에게, 금명이의 아빠처럼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고 실패하고 넘어져도 괜찮다고 또 다른 길은 어디에나 있다고 이제라도 스스로에게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해서 막연히 불안하고 두려운 세상으로 한 걸음을 더 내딛어도 괜찮다고, 그걸 넘어서야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자신에게 만들어 놓은 바운더리가 생각보다 아주 넓어서 웬만해선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고 어지간한 일로는 절망하지도 않으며 마음껏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자꾸만 모든 게 후회가 되고, 그렇게 스스로가 미워지고, 전부 다 내 탓이 되어버리는 날이 찾아온다고 해도 언제든 지친 마음이 쉴 수 있는 집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자신에게.
아직도 여전히 자꾸만 눈치를 보는 어떤 마음에게,
이제 그만 마음을 풀어놓고 자유롭게 날아가도 괜찮다고 작지만 단단한 용기를 보태줄 수 있는 오늘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