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언어보다 중요한 바디랭귀지

우당탕탕 나 홀로 산티아고, 에피소드4

by 아주nice

1-4. 언어보다 중요한 바디랭귀지 

브루고스라는 제법 큰 도시에 도착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나만의 일과 중 하나는 5일에 한 번 빨래하기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도시가 크니 셀프 빨래방이 있을 것 같아 구글 지도를 검색해 찾아나섰다. 그런데 가끔 건물과 건물 사이 어정쩡한 위치에 핀이 고정되어 있어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다. 천지가 스페인어인 이곳에서 단서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길거리에서 지나가던 여인을 붙잡아 빨래방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거침없는 스페인어. 하지만 그녀가 손끝으로 가리킨 방향을 믿고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를 던진 뒤 걸어가 보니, 거짓말처럼 그곳에 빨래방이 있었다. 순간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방금 무슨 대화를 나눈 걸까?' 그래도 찾았으면 된 거다.

빨래방 안은 마치 수다방처럼 활기찼다. 세탁기 앞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이 자기들 빨래가 도는 걸 지켜보며 한창 수다를 나누고 있었다. 낯선 나라 사람인 내가 들어서자 도와줘야겠다는 눈빛이 느껴졌는지 그분들은 세탁기 위에 적힌 스페인어 설명을 제스처로 하나하나 풀어가며 알려주었다.
1번, 세탁기 문을 연다. (그림이 그렇게 표시돼 있다.)
2번, 빨래를 넣는다. 내가 들고 있는 빨래를 가리키며 “여기요!” 같은 몸짓을 해주신다.
3번, 5유로를 넣는다. 내가 지폐를 꺼내자 “걱정 마세요”라는 눈빛으로 손을 잡고 동전 바꾸는 기계 앞으로 데려가더니 얼른 지폐를 넣으라고 손짓하셨다. 지폐를 넣으니 1유로짜리 동전 다섯 개가 나왔고, 그 모습을 보고 그분들이 더 기뻐하셨다.
4번, 온도를 정한다. 스페인어 설명 옆에 20도, 30도, 40도 같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 어느 온도를 선택할지 몸짓과 표정으로 설명해주신다.

신기한 건, 그분들은 끝까지 스페인어만 쓰셨는데도 나는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거다. 마치 동네 빨래방에서 친근한 할머니들과 만난 기분이었다. 나도 손짓과 표정으로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죠?”라며 대답했다. 그렇게 빨래가 돌아가는 세탁기를 지켜보고 있는데, 어느새 할머니들이 “어디서 왔어요?”라고 물으신다. 물론 스페인어로. “꼬레아?”라는 단어 덕분에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꼬레아! 꼬레아!”라고 외쳤더니, 갑자기 그분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본인의 휴대폰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주시기 시작했다. 며느리가 한국 사람이고, 아들과 손주는 지금 인천에 살고 있다고 하셨다. “저도 인천에서 왔어요!”라고 반가워 외쳤지만, 나는 영어로, 그분은 스페인어로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모든 말이 통했다. 눈빛, 손짓, 표정이 완벽한 번역기 역할을 해주고 있었던 거다.

사진 속 손주의 재롱을 설명할 때 할머니의 얼굴엔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너무도 익숙한 표정, 여느 한국 할머니와 다를 게 없었다. 손을 꼭 잡고 “아기가 너무 귀여워요, 축복해요”라고 말하자, 그분도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뭔가를 잔잔히 이야기해주셨다.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그 순간엔 굳이 알아들을 필요도 없었다. 표정과 손길, 그 따뜻함이 이미 다 말이 되어주었으니까.

어느 날은 음식점을 갔다. 역시나 메뉴판은 스페인어로만 되어 있었다. 영어 메뉴판이나 사진 메뉴는 없냐고 물어봐도 반응이 없었다. 결국 메뉴판을 구글 번역기에 돌려서 스페인어를 한국어로 바꿔 읽고, 기억해 두었다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메뉴를 가리켰다. 오늘은 3번 메뉴를 골랐고, 점원이 뭔가를 또 물어보았다. 음료를 고르라는 거였다. 망설이는 내 눈빛을 읽은 듯, 점원은 마치 “응, 그냥 이거 마셔. 다들 이거 시켜”라는 듯한 표정으로 와인과 와인잔을 갖다 주었다. 그렇게 저녁도 잘 먹었다.

스페인어 한 마디 못 하고, 영어도 유창하지 않지만, 이렇게 낯선 땅에서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다는 게 대견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길 위에서 매일 배운다. 부족해도 괜찮다. 낯설어도 웃을 수 있다.
스페인어 한 마디 못 하지만, 오늘도 아주 잘 걷고 있다.

keyword
이전 03화Wi-Fi가 끊기면 나도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