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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사재기의 최후

우당탕탕 나 홀로 산티아고, 에피소드5

by 아주nice

1-5. 라면사재기의 최후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스페인은 분명 아름다운 나라였지만, 나에겐 한 가지 커다란 고통이 있었다. 바로 음식.
아침도 빵, 점심도 빵, 저녁은 토마토 파스타나 감자, 소금에 절인 하몽… 밥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계란후라이 하나 없이 바게트빵과 올리브 오일, 감자튀김만 연일 먹고 있자니 속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북유럽도 그렇지만 특히 스페인 북부 지방은 매운맛이 전혀 없는 음식 문화로 유명하다. 고추장은커녕, ‘맵다’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나라 같았다. 속이 느글거려서 이러다 한국 음식 금단증상이 올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순례자들의 속삭임 속에서 한 줄기 희망 같은 말을 들었다. “내일쯤이면 중간 도시가 하나 나타나는데, 거기 아시안마켓에서 신라면 판대.”
그 말을 듣자마자 구글 지도를 켜고 ‘별표’를 박아 저장해뒀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트부터 찾았다. 아시안 슈퍼에 들어서는 순간, 눈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사발면, 김치 우동, 신라면, 게다가 깡통 김치까지! 어찌나 반가운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오늘 저녁만 먹을 거리를 사면 되는데, 이상하게 손이 멈추지 않았다. “언제 또 이런 슈퍼를 만나겠어?” 하는 마음에 이것저것 마구 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라면 6봉지, 김치, 귤, 사과, 그리고 계란까지 사게 됐다. 문제는, 계란을 한 알씩 팔지 않아 6개 묶음으로만 팔았다는 것.
숙소에 도착해보니 다행히 공용 주방에 인덕션이 있었고,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라면 한 봉지에 계란 두 개를 풀어 넣고 끓였다.
그리고 그 라면 한 그릇.
진심으로, 내 인생 최고의 맛이었다. 산해진미를 내 앞에 갖다줘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그 한 끼로 깨달았다. 세상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하지만 기쁨도 잠시, 진짜 문제는 그날 밤에 시작됐다.
“이걸... 다 배낭에 어떻게 넣지?”
너무 많이 산 탓에 배낭은 물론 보조가방까지 꽉 차버렸다. 아침에 출발하려는데 4개나 남은 생달걀은 들고 나가기도 애매하고, 라면과 김치, 귤과 사과까지 어찌나 무거운지, 걷다가 중간에 도로 다 버리고 싶어졌다. 꼭 ‘내일은 오지 않을 것처럼’ 사재기한 대가를 고스란히 지고 고행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매일 라면이 먹고 싶은 것도 아닌데, 짐만 잔뜩 들고 다녀야 한다니... 다음 날도 ‘오늘 저녁은 또 라면이다!’ 하고 기대했건만, 내 착각이었다.
이번 숙소에는 인덕션은커녕 가스레인지도 없고, 겨우 물 끓이는 전기 주전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사발면이 아니라 끓이는 라면을 샀기 때문에, 뜨거운 물만 부어선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이쯤 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이곳은 직접 걷고 살아봐야 알 수 있는 세계라는 걸.
그리고 그날, 나는 조용히 결심했다. 남은 20여 일은 더 이상 사재기를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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