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로마 공항에서 시내 가기
짐을 찾아 공항 화장실 안에서 여행 기분이 나는 옷으로 갈아입고 게이트를 나섰다. 공항 근처엔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있어 외국인이 많은 것 빼고는 여기가 이탈리아인지 인천인지 모두 실감이 나지 않는 듯 했다.
‘아무래도 유럽식 건물들이 있는 시내로 들어가야 실감이 나겠구나.’ 나는 이내 곧장 가이드 모드를 장착했다. 그리곤 두 사람을 데리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이탈리아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로마 시내까지는 크게 세 가지 교통수단이 있다. 첫 번째는 원하는 장소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지만 가격이 사악한 택시(편도 50유로 정도), 두 번째는 관광 거점이 되는 떼르미니역까지 빠르고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는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 기차(편도 14유로), 마지막으로 제일 가격이 저렴한 공항버스가 있다(편도 6유로). 관광객들은 보통 떼르미니역 근처에 숙소를 잡고, 아무래도 기차가 출발이나 도착 시간이 정확하기 때문에 기차를 많이 이용하는 편인데 나는 호기롭게 공항버스를 선택했다. 가격에서 메리트가 제일 크기도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왜 버스를 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시간대도 많고 버스 컨디션도 좋다. 게다가 우리는 복잡한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파트를 예약했는데 마침 우리가 잡은 숙소 근처에 공항버스 정류장이 있었기 때문에 효율성이 좋아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비교적 젊은이(?)인 나의 생각이었으므로 엄마에게도 미리 의사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의 브리핑을 들을 엄마는 공항버스 탑승을 승인했다.
현재 시각은 대략 9시. 예약한 숙소의 호스트는 체크인은 오후 3시부터 가능하지만 오전 11시쯤부터는 짐을 맡아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여유롭게 버스를 타고 가서 짐을 놓고 근처에서 점심을 먹은 뒤 오후 1시, 미리 예약해 둔 바티칸 투어에 갈 계획이었다. 테트리스처럼 잘 짜인 계획. 사실 나는 원래 여행에서 시간 단위로 계획을 짜는 스타일은 아니다. 다만 아이스크림을 꾹꾹 눌러 담으려고 보니 자연스럽게 타임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이 글을 보는 극P 성향의 누군가가 있다면 분명 고개를 절레절레 젓겠으나 (실제로 여행일정표를 가족 단톡방에 공유했을 때 MBTI P 성향인 둘째 동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혼자도, 친구도 아닌 엄마와 여행을 오기로 한 이상 나는 여행사의 직원에 빙의나 한 듯 경우의 수를 따질 수밖에. 한정된 시간과 돈을 가지고 최대 효율을 내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P에서 J로 바뀐 사람으로서 단언하건데 즉흥적인 것은 여유에서 온다.
여하튼, 계획은 완벽하니 이제 퀘스트를 수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돌격 앞으로.
공항버스 정류장은 3터미널 근처, 캐리어를 끌고 도착한 우리는 버스표를 현장에서 구매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출발할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왔다. 버스는 꽤나 최신식이었다. 충전 단자도 있고 와이파이도 됐다. 게다가 붐비는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몇 명 탑승하지도 않았다. 참고로 대다수는 현지인으로 보였고 외국인 중에서도 아시아인은 우리 가족뿐이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T.A.M이라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버스였는데 이 회사의 버스를 선택한 건 종착지인 떼르미니 역에 가기 전, 우리 숙소 근처인 Ostiense역을 경유하기 때문이었다. (꼭 이 회사가 아니더라도 떼르미니역까지 간다면 중간에 어디도 들리지 않는 옵션도 존재한다.) 출발한 버스는 시내까지 교통체증 없이 달렸다. 이탈리아의 고속도로는 유독 우리나라 고속도로와 비슷하다. 몇 분간은 익숙한 풍경이 지속됐다. 슬슬 시내에 가까워 창밖의 풍경이 익숙하지 않을 쯤 되자 나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고 숙소 호스트에게 연락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구글맵을 켠 순간 직감적으로 알았다. 싸늘하다. 경로를 이탈한 기분이 가슴에 꽂힌다. 버스는 우리를 내려 줘야할 Ostiense역을 지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순간 멘붕이 찾아왔다. 뭐지? 정차 버튼을 눌러서 내리겠다는 의사를 표했어야 했나.
“왜? 내릴 곳을 지나쳤어?” 엄마는 물었다.
“아니, 지나친 게 아니라 아예 지나가지 않은 거 같아. 잠깐만 엄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기사에게 찾아갔다. 잠시 신호에 걸려 멈춘 순간. 난 재빠르게 기사님께 말을 걸었다.
“Excuse me, sir. I had to go to the Ostiense station”
(저 죄송한데 제가 Ostiense역에 내렸어야 했는데요)
그러자 기사님은 매우 당황했다. 아무도 자신에게 Ostiense에 가야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서. 대화 내용이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무래도 검표하는 직원분이 기사님에게 중간 역에 가는 손님이 있다는 것을 전달했어야하는 모양이었다. 탄 사람도 매우 적고 평일 오전 시간이니 기사님은 경유지 따위야 가뿐히 패스하고 빠른 길로 종착역에 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인들이 유럽인들 중에서 가장 한국인과 비슷하다더니 그걸 여기서 느끼게 될 줄이야. 불행 중 다행인건 기사님이 매우 나이스하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는 점이었다. 몇 년 전 이탈리아로 여행을 왔을 땐 현지인들이 영어를 잘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게다가 만일 버스 기사가 네가 못 내렸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해버리면 관광객인 나로썬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텐데 기사님은 실수를 인정했다. 그리곤 혹시 시간 여유가 있으면 종점인 떼르미니에 역까지 가서 내린 후 내리려던 역까지 갈 수 있게 돌아가는 버스로 환승시켜주겠다고 얘기했다. 자신의 동료에게 잘 설명할 것이며 추가 요금도 받지 않을 거라고.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니 사실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겐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비행기나 투어 시간이 걸려 당장에 버스를 세워 택시를 타야했다면 매우 아찔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는 기사님께 알겠다고 대답한 후 자리로 돌아와 걱정하고 있는 엄마를 안심시켰다. 그래 이런 일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어(?).
그렇게 십 분 쯤 지났을까 경유지를 거치지 않고 신나게 달린 버스는 금방 종점인 떼르미니에 도착했다.
“이렇게 셋이 네 일행인거지?”
우리 가족을 보며 기사님은 물었다.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너무 많아서 당황했나? 잔뜩 긴장한 상태로 그렇다고 대답한 나를 데리고 기사님은 대수롭지 않게 반대 방향으로 출발을 준비 중인 버스 앞에 데려갔다. 병아리 군단처럼 기사님을 따라가자 그는 형광 조끼를 입은 검표원을 불러 뭐라 뭐라 유창한 이탈리어로 이야기했다. 유창이라... 당연하겠지, 그는 이탈리아 사람일 텐데.
‘안 된다고 하진 않겠지 설마?’
두 사람의 대화를 정말 단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저 사회생활용 미소를 지어보였고 그런 나에게 기사님은 이제 버스에 타면 된다며 쿨하게 Sorry를 날리고 돌아갔다. 검표원 역시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He is the best driver!” 한 마디를 보탰다.
꽤나 유쾌한 이탈리아 아저씨들 덕분에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래 꼬인 건 아무 것도 없어. 그저 조금 더 걸려서 숙소에 도착할 뿐. 오히려 약속 시간에 딱 맞춰 갈 것 같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렇게 엄마와 함께 버스에 오르자 버스는 거의 만원이었다. 적당한 시간에 시내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제 무사히 숙소로 가는 일만 남았군. 비로소 마음을 놓고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 자리를 찾아 앉아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 때. 또 다시 일이 터졌다.
아까 자신의 친구는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외치며 우리를 버스에 태웠던 검표원이 다가와 대뜸 우리에게 표를 요구한 것이다.
‘뭐지, 아까 출발할 때 산 표를 말하는 건가?’
나는 공항에서 출발할 때 끊었던 표를 꺼내 그에게 보여줬다. 그랬더니 그는
“No, No. This is One way! You have to have Two-way ticket!”
(아니, 이건 편도 티켓이고. 왕복표가 있어야지.)
뭐? 그는 나에게 Round trip ticket(왕복표)를 요구하는 듯 했다. 아니 방금 밖에서 그렇게 단란하게 얘기했던 건 도대체 뭔데. 하지만 두 사람이 이탈리아로 대화한 내용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황해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엄마는 옆에서 걱정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고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는 승객들로 가득했다. 그야말로 멘붕이 된 나는 영어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The driver made a mistake earlier, so he said he would transfer me to this bus instead. You have already talked with him!“
(아까 그 기사님이 실수를 했고 그래서 우리를 이 버스로 환승시켜준다고 했어요.
아까 그와 얘기도 했잖아요!)
그래, 고백하건데 이렇게 완벽한 문장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그에게 아까 네 친구인 그 기사가 실수했고 우리를 환승을 시켜주기로 했다는 얘기를 화를 내며 뱉어냈다. 지금 나는 20시간을 날아왔고 한 숨도 못 잤다고. 아직 숙소에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다 포기하고 울고 싶은 마음을 아저씨가 알아요?!
게다가 점점 집주인과 약속한 시간은 다가오고, 만약 여기서 이렇게 내려야하면 돈을 아끼려고 버스를 타 놓고 훨씬 더 많은 돈을 길바닥에 뿌려야할지도 모르는 상황.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내가 불쌍했던 거였을까 아니면 잠시 까먹었던 기억이 돌아왔던 걸까? 그는 화를 내는 나를 보다 어깨를 으쓱하더니 더 이상 표를 요구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사실 이건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끝끝내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았다. 동양인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아님 그 전 버스 기사와 뭔가 불통이 있었던 걸까.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지나고 어안이 벙벙해 있는 나에게 앞자리에 앉은 미국인 부부는 원래 외국에서 환승이 쉽지 않다며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실 이건 환승도 아닌데, 잘못에 대한 보상일 뿐이라고요.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나는 대충 대꾸를 하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이 생겼지, 내가 영어를 더 유창하게 했으면 당황하지 않고 잘 설명 했을 텐데. 아니 애초에 난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엄마를 옆에 두고 첫 날부터 일이 꼬여가자 잔뜩 부정적인 마음이 샘솟았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무려 로마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