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엄마 큰 캐리어는 정말 그냥 짐이라니까.
심지어 엄마가 가고 싶다고 한 로마는 길을 안 닦아서 돌바닥이라고!
그 사이로 바퀴가 끼어 굴러가지도 않아, 그걸 엄마가 들고 다닐 거야?”
“아니 너는 신경 쓰지 마, 너한테 들으라고 안 한다니까?”
“그럼 그걸 누가 들을 건데!”
“서균이한테 들라고 하든 내가 들든 할 게! 여하튼 너한테 들으라고 안 해”
출발도 하지 않은 한국. 전화를 사이에 두고 엄마와 나는 벌써 며칠 째 그 놈의 캐리어로 싸우는 중이었다. 아 잠깐 먼저 소개하자면, 본인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미 짐꾼이 되어 버린 ‘서균이’는 나의 막냇동생이다. 그는 아직 대학원을 다니는 중인데 (여느 남매와 같이 도대체 정확히 뭘 배우고 연구하는지는 잘 모른다.) 추석 연휴에 휴가를 더해 이번 여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TMI를 하나 더 하자면 나와 막냇동생은 데면데면한 사이다. 다만 엄마가 모녀 여행이 아니라 ‘가족 여행’을 바라는 것이라면 엄마에게 맞춰주고 싶은 마음이 컸으므로 딱히 군말하지 않았다.
다시 캐리어 이야기로 돌아오면 싸움의 전말은 이렇다. 이렇게 멀리 장기 여행을 가본 적이 없는 엄마는 큰 캐리어를 가져가야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마침 집에는 28인치와 20인치 캐리어가 있었고 여행을 위해서 굳이 캐리어를 사고 싶지 않으므로 집에 있는 두 캐리어를 챙기겠다고 얘기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경악했다. (물론 내가 여행에 짐을 많이 챙기지 않는 편이지만) 우리가 가는 9월은 프랑스 파리를 제외하곤 거의 30도에 육박하는 날씨로 여름옷이 주로 필요했고 부러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는 아파트먼트 숙소들을 예약했으며 엄마도 나도 어딜 가서 기념품을 쓸어 담아오는 성격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라 간 이동이 많고 이동 수단으로는 모두 저가 항공 비행기를 예약했으니 수하물이 늘어나면 비용도 비용이고 숙소를 옮길 때마다 고생길이 훤할 것이 눈에 보였다.
실제로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했던 시절, 나는 가끔 주변 국가들을 짧게 여행 했었는데 캐리어도 아닌 백팩을 하나 들고 3박 4일, 여름엔 일주일까지도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 한인 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며 다른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나의 가벼운 짐은 엄청난 부러움을 샀다. 그들은 도시 간 혹은 나라 간을 이동할 때마다 가끔씩 캐리어를 버리고 싶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유럽의 아름다운 거리는 빌어먹을 돌바닥이 많다. 덜덜 거리며 캐리어를 끌고 다니다 바퀴가 끼어 고생하는 사람들도 여럿 봤었다.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도 할배들이 캐리어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하시는 모습이 나오지 않던가. 우린 예능을 찍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이미 보이는 고생길을 굳이 갈 필요가 있을 리가.
그러나 생각보다 엄마는 강경했다. 왜 이런 걸 가지고 이렇게 싸워야하지 싶을 정도로.
“아니 뭘 그렇게 많이 가져가려고? 가져갈 것도 없잖아. 한국 음식 많이 안 가져가도 된다니까? 요즘에 큰 마트만 가도 신라면도 다 팔고, 한국 식당도 많아, 엄마. 아님 뭘 많이 사 오려고 그런 거야?”
“아니 뭘 사 오진 않을 건데, 짐 싸다 보면 많지 너가 수영복도 챙기랬지, 수건도 하나씩 챙기랬지.
그리고 이거 때문에 캐리어를 새로 사?”
다음 중 엄마가 큰 캐리어를 가져가야겠다고 하는 진짜 이유를 고르시오.
1. 장기간 여행에 챙겨 가야할 짐이 많아서. 2. 굳이 새 캐리어를 사고 싶지 않아서. 정답은?
머릿속에서 장학퀴즈라도 펼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리해보자면 엄마의 말인즉 기내용 20인치 작은 캐리어는 차라리 활용도가 높은데 수화물용 중간 캐리어는 사도 활용도가 적으니 굳이 이번 여행을 위해서 사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20인치 캐리어에 2주 동안의 짐을 다 우겨 넣으라고 하는 건 내가 봐도 욕심이고 지금 이 글을 쓰며 보니 엄마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렇게 화가 나고, 돈 조금 아끼자고 훤히 보이는 고생길로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을까. 결국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은 엄마와 나는 고작 ‘캐리어’ 때문에 한동안 통화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친한 친구들에게 캐리어 사건을 얘기하자 한 친구는 이런 일로 출국하기 전부터 부딪히다보니 네가 마치 이게 어떤 거대한 사건의 서막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라며 막상 떠나면 괜찮을 거다 위로했고 또 다른 친구는 자신에게 24인치 캐리어가 있으니 빌려 주마까지 얘기해줬다. 그래서 어떻게 해결했냐고?
어이없게도 이 문제는 엄청 간단하게 해결됐는데, 나와 한바탕 싸우고 난 후 엄마가 집에 있는 캐리어를 확인해 본 결과 28인치인 줄 알았던 캐리어는 24인치였고 바로 그 사이즈가 내가 가져가도 좋다고 한 최대 사이즈였기 때문에 우리는 극적으로 합의점에 도달했다. 그래 28인치가 얼마나 거대한데, 엄마 딸래미도 구기면 들어가 거기. 결국 우리는 둘 다 24인치 캐리어를 들고 단란히 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