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그래 내가 먼저 꼬셨다.

(부제 : 나라 정하기)

by 장소연

사실 엄마에게 답변이 오길 기다리는 며칠 동안 나의 충동은 많이 진정되어 있었다. 원래 충동이란 것이 순간을 의미하는 단어니까. 여튼. 엄마한테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정작 엄마의 승낙 전화를 받은 그 때, 나에겐 갑자기 현실들이 물 밀 듯 밀려왔다. 호기롭게 여행 자금으로 쓰려고 했던 돈은 사실 개인 작업 준비를 위해 모아 뒀던 돈이었고 거기에 추석이라는 프리미엄에 생각보다 너무 올라버린 비행기 티켓 가격, 도피하고 싶었으나 여전히 빙글 빙글 돌아가고 있는 현생의 수많은 일들까지. 게다가 나 역시 ‘쉬고 싶어서’ 결심한 여행이었는데 막상 뒤돌아 생각해보니 엄마와 함께 가는 여행이라면 분명 ‘쉼’아니라 ‘일’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히 보였다.


‘어쩌지, 엎어?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아? 비행기 티켓 값이 생각보다 너무 비싸다고 할까?

아님 갑자기 돈 쓸 일이 생겨서 어렵다고?’


짧은 순간 뇌리를 스치는 수많은 생각들에 마음이 어지러웠지만 이윽고 나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강하늘에 빙의라도 한 듯 엄마한테 전화했던 그날의 자아를 데려오기로 했다.


‘그래, 내가 먼저 꼬셨잖아. 낙장불입이다.’


“엄마, 그럼 내가 미리 비행기 표 살게, 나라는 어디가 좋아?”


추석 연휴가 시작하는 날부터 한글날까지. 징검다리 휴일들에 연차를 끼워 넣으면 정확히 2주의 시간, 앞뒤로 비행기에서 꼬박 보내야하는 이틀을 제외하면 12일. 엄마의 체력과 이동 시간을 고려해서 너무 많은 나라를 갈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나는 유럽이 처음도 아니었다. 대학 시절 ‘아일랜드’에서 약 1년 정도의 어학연수를 하며 굵직한 국가들은 다녀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 나라 선정은 백 프로 엄마의 선호에 맡기고자 했다.


“음 스페인? 티브이에서 보니까 그 성당 멋지더라.”


확실히 우리는 미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산다. 스페인은 2023년 유난히 많은 여행 예능의 배경이 된 나라였다. 엄마 역시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온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여하튼 스페인? 오케이. 게다가 나도 스페인은 가본 적이 없다.


“그래 좋아, 그럼 다른 나라는? 아님 스페인 한 국가만 갈까?

요즘에는 그렇게도 많이 가던데, 스페인에 갈만한 도시가 많거든.”


엄마가 스페인을 얘기하자 작년에 결혼한 친구 부부의 신혼 여행지가 마침 스페인이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 부부는 다른 국가는 가지 않고 스페인만 여행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페인엔 매력적인 도시들이 많다. 가우디로 유명한 바르셀로나, 수도인 마드리드,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 열정의 플라맹고가 있는 세비야. 거기에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고 포르투갈로 넘어간 후 세계의 끝이라는 포르투 호카곶까지 가는 루트는 꽤나 유명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정작 엄마는 스페인에서만 있는 건 아쉽다는 반응이었다. 그래, 유럽은 너무 멀고 언제 다시 갈지 알 수 없으니 한 국가만 가는 건 내가 생각해도 좀 아쉬울 것 같았다. 2주, 물론 하나의 나라, 하나의 도시에만 있어도 부족하다면 부족한 시간이겠지만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효율과 빨리 빨리의 민족 아닌가. 60 평생 처음 가는 유럽인데, 한 나라에 2주는 민족성에 어긋난다. 재빨리, 나는 엄마에게 국가 하나를 더 골라보라고 제안했다.


“그래 맞아, 스페인 하나만 가긴 아까워. 다른 데 가고 싶은 곳은 없어?”

“뭐, 엄만 다 좋지 처음 가는 데.”


비상. 엄마가 ‘다 좋지’를 시전 했다. 이렇게 나온다면, 내가 할 일은 머리를 빨리 굴리는 것. 다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엄마의 선호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좁은 선택지를 제시해야한다. 짧은 순간 나는 스페인을 기준으로 동선이 용이한 국가들을 생각해냈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흠 스위스는 물가가 너무 비싸니 이번엔 아웃. 하지만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이미 혼자 다녀온 경험이 있는 나라였다. 아무렴 어떤가 엄마와는 처음 가는 건데.


“그럼 엄마, 이탈리아나 프랑스는 어때?”

“진짜 엄만, 둘 다 좋은데.”

“둘 중에 하나만 하면?”

“음...”


여기서 잠깐, 나에게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선호를 고르라고 하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프랑스였다. 그리고 그 때의 난 엄마 역시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고? 우리 엄만 미대 나온 여자니까. 엄마는 대학시절 미술을 전공했다. 회화 전공은 아니었지만, ‘인상파’ 화가들과 그림을 좋아하는 엄마를 덕분에 어릴 적 나는 미술관도 깨나 다녔다. 그러니 ‘인상파’ 거장들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 예술의 도시, 파리. 엄마도 당연 프랑스를 고를게 뻔했다. 이미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나는 엄마와 함께 그림을 보러 다닐 생각에 한껏 마음이 부풀었다. 그런데.


“둘 중에 하나면, 이탈리아?”


맙소사. 무려 이분의 일, 반반의 확률인데 이걸 틀린다고? 아니 그걸 떠나서 이탈리아? 물론 이탈리아는 분명 아름다운 곳이지만 나는 엄마에게 파리를 꼭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가 돌잔치 때 내가 바라던 것과 다른 걸 집으면 이런 마음이 들까. 그렇다고 둘 중에 하나 골라보라고 해놓고 이걸 무를 수도 없고. 내 예상과 어긋난 엄마의 대답에 전화기를 들고 있는 그 짧은 순간 난 또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냥 이탈리아 프랑스 둘 다 가면 너무 빡빡하려나. 순전히 내 욕심이면 어쩌지...? However! 솔직히 프랑스는 못 참지!


“엄마, 사실 나는 엄마가 프랑스를 가보면 좋을 것 같았거든...?

좀 빡빡하지만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이렇게 세 나라를 가는 건 어때?”


순간 머릿속에, 엄마가 “난 프랑스는 안 가도 돼”라거나 “아, 그럼 너무 힘들 것 같은데?”라고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그런데


“정말? 나는 프랑스도 가보고 싶지.

너가 두 개만 고르라고 했으니까 고른 거지. 그렇게 해도 일정이 돼?”


아. 애초에 내가 나빴구나. 태어나 처음 온갖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에 가 본 사람에게 딱 두 가지 맛만 고를 수 있다고 한 샘이었다. 당연히 두 개를 골라도 다른 맛이 궁금하고 아쉬울 텐데. 마치 한 가지 맛을 더 골라도 되는지 허락을 받는 아이처럼, 엄마는 물었다.


“응, 도시를 옮기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 프랑스랑 이탈리아는 근처에 있거든.”

“그래? 그럼 프랑스도 가자!”

“좋아 그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이렇게 가는 거야!”


그렇게 하나에서 두 개, 두 개에서 세 개의 국가가 된 엄마의 첫 유럽 여행. 물론 똑같은 컵에 두 가지 맛이 아니라 세 가지 맛을 담으면 각각의 양이 조금씩 줄어들 수밖에 없지만, 나는 어떻게든 꽉꽉 눌러 담아 보기로

했다. 그리고 웃으며 얘기해야지.


“정량보다 많이 담아 드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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