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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Nov 16. 2024

경로 이탈

그리움

따뜻한 물 한잔 주세요.


이 한마디를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하지만 이 말을 듣은 직원은 빤히 쳐다보며 어리둥절하다. 아니 이 멋진 카페에 와서는 물 한잔 이라고요 하는 표정을 나름 즐기기도 한다.


이곳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가 단호박 샌드위치라는 걸 모르니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다소 거칠게 슬라이스 되어 느끼한 마요네즈에 버물린 단호박이 한 입 가득 차는 순간의 행복을 안 해본 사람은 어찌 알까. 이른 아침의 행복이다.

 

차량 출입 통제라는 팻말을 보자마자 이상한 자유에 마음이 붕붕 신이 났다. 해야 할 것들과 빌려야 할 책을 뒤로 모조리 힘껏 패대기치고 산모퉁이를 돌아 기다란 나무 사이를 달렸다. 창문을 열고 입까지 크게 벌려 아침 공기를 마음껏 마셨다.

 

오늘의 일정들이 꼼꼼하게 들어찬 스케쥴러를 들여다보며 우물거리며 단호박을 씹는 이 시간은 단 한번 지금 뿐이다.


첫 계획의 안착이 불발되고 경로를 바꿔 두 번째 일정에서 거절당하고 카페에 앉아 모닝 샌드위치를 먹는다. 두 번의 어그러짐으로 얻은 행복도 맛나다.


학생들의 시험으로 폐쇄된 후문 앞을 유유히 지나며 길가에 주르르 서서 춤추듯 교통정리를 하는 무표정의 잠이 덜 깬듯한 사람들을 본다.


핏기 없고 앳된 아이들이 분주히 내리며 긴장한 모습으로 걸어 들어간다. 잘 마치고 웃으며 나오는 자신을 연상하면서 시험장을 들어가면 좋아, 매번 시험을 앞둔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다. 마음으로 응원한다.


분주하고 고단한 세상들이 나를 스쳐간다. 나도 분주했던가 나도 고단한 적이 있었던가. 세상모르게 바빴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믿는다. 그땐 그걸 최선이었다고 생각했으므로 후회는 없다. 그래서 지금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고 있는 것이다.


'I'm dreaming of a white Christmas... ' 꿈까지 꿀 필요는 없다. 눈이 오면 특별해지는 세상에 의미를 꾹꾹 꽂아 기쁘면 되는 거다.


스윙으로 숨 가쁘다가 저스틴 비버로 바뀌었다가 다시 조용한 노래가 마음을 휩쓴다. 리듬과 가사가 마음에 들어오면 미각 세포마저 길을 잃고 한동안 무표정이다. 먹고 있다는 것조차 잊게 만드는 음악, 가사, 의미, 끈적이는 가치들, 내가 사랑하는 것들, 생각만 해도 가슴 저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시간에 내가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혼자 감동하며 하늘을 보며 머쓱하다.


이런 게 행복이라는 건가 보다.

이럴 때 행복하다고 말하나 보다.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나 한다.


따뜻한 머그를 손으로 감싸며 혼자 앉아서 사람들을 하나씩 가슴에 담는다. 만났던 사람과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게 될 사람과 만나야 할 사람들,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짙은 재즈 같은 노래에 얹는다. 나의 상상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상상밖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상상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 안의 상상과 내 밖의 상상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옆 자리 사람이 다리를 심하게 떨며 내 오른쪽 눈에 현기증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오늘은 그 마저 상상 밖으로 가만히 두고 내 예민을 밟고 서서 조금 너그러운 하루를 살아보겠다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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