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떠나는 거야?"
"꿈이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은 허황된 거야. 내 디자인을 다시 해체하고 다른 방향을 향해 다시 꿰어 맞추는 건 나를 배신하는 거라 느꼈지. 꿈 따윈 없어. 그냥 절실히 살아가는 거야. 나는 세상이 원하는 대로 가끔 나를 찢어 맞추는 고통이 결국 내가 따라갈 빛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가고 있는 거 같아. 이런 기회들 말이야. 그 빛을 향해 가는 거야."
준하의 대답에 희서는 얼른 눈을 감았다. 시선을 어디에도 둘 수 없는 당황이 엄습했다. 눈물이라도 흐르면 너무 마음이 약해져서 무슨 말이든 마구 던질 것 같았다.
"그래, 그 빛을 향해 가는 거야."
희서가 짧게 준하에게 대꾸했다. 아니 준하가 원하는 것을 반복했다. 준하가 잘하고 있다고, 원하는 곳에서 잘 해낼 수 있다고 다독이고 싶었지만 건네는 한 단어 한 단어 사이에는 미세한 흔들림과 통증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준하는 벌써 희서를 떠나고 있었다. 희서의 모든 것이 준하에게 건너가서는 길을 잃고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준하로부터 건너온 가느다란 생명 하나만 희서 안에 남아 조용히 희서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세대가 다음 세대로 바뀌는 것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희서는 우두커니 양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가자. 앞으로 두 달이면 정리하고 새로 시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야. 네가 허락해 주면 좋겠어."
"내 허락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은데? 하하! 넌 이미 모두 결정했잖아. 그럼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하도록 해. 나는 괜찮아."
희서는 준하의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따뜻한 희서의 온기가 준하에게 건너갔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바랐다. 준하는 정말 모든 것을 결정해 두고 희서를 그의 삶으로 정중히 초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장 그러자고 하지 못하는 머뭇거림의 이유를 모두 털어놓지는 못했다.
그래도 고민해야 했다. 지금까지의 삶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는 거였다. 준하가 없을 시간에 대한 생각은 해본 적 없다는 것이 가장 막막했다. 상황은 그런 시간을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계속 희서를 떠밀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준하는 없지만 준하와 평생 같이 하는 것 같은 삶은 가능하니 다행인가 하는 생각까지 오자 피식 웃음이 났다. 웃었다가 울었다가... 희서는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그래 결국은 이렇게 정리해야 하는 거구나. 오랫동안 혼자였던 희서는 다시 끓는 생존 투쟁을 위한 에너지를 억지로라도 퍼올려야 했다. 왜냐면 희서는 생명을 품고 책임지며 잘 살아내고 싶었으니까.
준하는 연일 들떠 연락을 했고 친구들을 자주 불러냈다. 곧 준하가 프랑스로 떠날 것이고 동후는 카톨릭 사제가 되기 위해 기숙사로 들어가 일 년은 족히 보지 못한다고 했다. 헤어져야 하는 교차로를 향해 우리 모두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들떠 기쁜 준하와 마주할 때마다 남은 준하를 마음껏 마음에 넣어두어야지 하다가도 그가 곧 비울 허전한 공간을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떠날 날이 다가오면서 밝은 표정으로 신나게 떠들면서도 극도로 엄습하는 혼자라는 두려움에 몸과 마음이 바짝바짝 말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