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후가 매일 희서 옆에 있다는 것을 빼고는 크게 변한 건 없었다. 둘 다 학업을 마쳐야 해서 서로 서재에 틀어박혀 자신의 연구를 하느라 밥 먹을 때 빼고는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가끔 거실 소파에서 차를 마시며 동후에게 기대어 있을 때는 정말 위안이 되고 따뜻했다.
학위 논문에 쓸 데이터를 정리하거나 분석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서로 진지하게 말이 통한다는 게 희서는 가장 기뻤다. 이과 전공을 한 동후가 체계적으로 데이터의 통계적인 의미를 설명해 주곤 했다.
미국의 지도교수에게 모아 분석해 둔 데이터에 대해 화상으로 최종 보고를 한 후 승인을 받은 터라 논문 마무리와 제출을 하러 잠시 미국에 다녀올 작정이었다. 학위수여식에는 가지 않으려 했지만 동후가 일생 한 번의 박사학위니 꼭 가야 한다고 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박사 학위기는 국제 우편으로도 받을 수 있었다.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 같아 미래의 희서 모습에 스스로도 기대를 하곤 했다. 논문 작성을 위해 가르치던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지만 두 곳의 초등학교 중 계속 강의를 맡아달라는 한 곳이 있어 새로 계약을 했다. 강의하던 대학도 박사 학위를 받으면 시간 강사가 아니라 조교수 직으로 다시 지원할 생각이었다.
동후 또한 석박사통합과정의 이론 수업 과정이 끝나고 논문을 남겨두고 있었다. 물론 논문을 위한 실험이나 데이터 연구가 있어 족히 3년은 더 해야 박사학위를 받겠지만 신분은 박사 수료였다.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일주일에 두 과목 정도를 가르치게 되어 한껏 들떠있는 동후가 대견했다.
동후와 같이 지낸 지 4년이 지나고 있었다. 같이 운동하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밥 먹으며 둘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었다. 삶의 동지라고나 할까. 희서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무엇을 하든 편안하고 안정스러웠다.
이사 온 동네에 익숙해지고 주변 이웃들과 가볍게 인사도 해가며 마치 여느 신혼부부와 다를 것 없이 지내고 있었다. 동후와 희서는 같은 라인의 할머니 자매를 만나는 걸 제일 싫어했다. 만날 때마다 둘을 붙들고 서서 왜 애가 없냐고 묻곤 했다. 요즘에는 애 없어도 잘 지낼 수 있다고 동후가 대답하자 그건 자손의 도리가 아니라며 대를 잇지 못하는 건 천하에 몹쓸 일이라며 한참 동안 훈계를 하곤 했다.
동후와 희서는 밖에서는 부부 같고 안에서는 친구인 독특한 한 쌍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에서는 애틋한 부부로 밖에 나가면 친구처럼 보이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동후에게 고마워서 희서는 항상 밝게 보이려 노력하고 있었다. 둘 다 눈코뜰 새 없이 바쁠 때는 시간이 휙휙 빠르게 지나갔지만 집에 오래 머무는 시간, 특히 주말에는 여전히 서먹한 시간들이 구석구석 존재하고 있었다.
희서는 방 한쪽 서랍 안에 주홍색과 흰색으로 나란히 놓인 준하가 준 실크 슬립만 보면 여전히 가슴이 뜨거웠다. 그러다 눈물이라도 나면 문을 잠그고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곤 했다. 그런 날 동후와 밥이라도 같이 먹을 때면 자신의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내보일까 봐 전전긍긍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