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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방식

by 희수공원

동후는 여전히 일주일에 두어 번씩 희서에게 와서 차를 마시거나 맛난 레시피를 풀어놓고 가곤 했다. 희서의 어색함을 눈치챘는지 전보다 더 분주하고 수다스러워진 동후를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그냥 이런 부대낌이 매일 있는 게 그다지 나쁜 건 아니지 않을까. 희서는 동후를 완전히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사회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묶이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어. 결혼이나 그런 걸 생각하는 건 아니지?"

희서의 직설적인 질문에 동후는 갑자기 멈칫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기만 하는 동후에게 불안을 느꼈지만 동후가 대답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갑작스럽게 모든 결정권이 희서에게 돌아오자 약간의 공포가 밀려왔다. 희서가 원하는 건 그냥 지금처럼, 아니 동후의 고백이 있기 전처럼 그렇게 만나 즐겁게 지내는 것이었다. 동후도 그걸 알고 있었다. 대체 희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답답함이 밀려왔다. 관계가 복잡해지는 건 정말이지 싫은 희서였다.

"알았어.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허락하는 만큼만이야."

희서는 어서 상황을 끝내고 싶어 단호하게 조건을 말했다. 어쩐지 뭐라고 할 만도 한데 동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사를 해야겠어. 여긴 방이 하나니까."

여러 가지 상황들이 정리되는 말이었을 거라 희서는 생각했다. 동후가 희서의 마음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이사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한 사람의 공간이 둘이 살아야 하는 공간으로 바뀌는 건 삶이 180도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희서는 마음의 여유 공간도 필요했지만 물리적인 여유 공간도 필요한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야 잠을 잘 수 있는 그녀, 옆에 누구라도 있으면 잠들지 못하는 그녀였다. 화장실 두 개가 제대로 적절하게 위치해 있는 아파트를 구하면 될 것이었다.

큰 방과 작은 방의 크기가 거의 비슷하고 큰방에 화장실만 딸려 있으면 되었다. 희서의 삶에 사람이 들어오는 일이었다. 희서는 아버지의 유산 중 얼마간을 사용하기로 했다. 동후에게는 희서가 알아서 집을 구하겠다고 말한 터였다.

깊이 사랑에 빠진 건 아니더라도 친구처럼 동료처럼 삶의 시간을 같이 할 사람, 아버지가 저 위에서나마 그런 희서의 사람을 환영해 주길 바랐다. 사실 아버지가 환영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아버지는 희서가 어떤 사람을 만나길 원했을까 하고 가끔씩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아버지를 원망하곤 했었다.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건,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저를 위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쓰겠어요.'


속으로도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꾸역꾸역 목으로 올라오는 뜨거움이 연민인지 분노인지 아님 정말 조금의 감사함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희서의 인생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희서는 강의하고 있는 대학 근처에 아파트를 구했다. 욕조가 딸린 화장실을 가진 큰방은 희서가, 주방 옆에 붙은 방은 동후가 쓰기로 했다. 주방을 지나 작은 방은 동후의 서재로 쓰기로 하고, 현관 옆 가장 작은 방을 희서의 서재로 하기로 했다. 서로 두 개 공간을 더하면 비슷하게 자기 공간을 갖는 것이라서 희서는 만족했다.

마치 땅따먹기 게임을 시작한 것처럼 똑같은 지분으로 동후와 같은 출발선에 섰다고 생각했다. 그냥 조금 다른 방식의 신선한 시작이라 여겼다. 동후만큼 희서를 보살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둘의 이사가 끝나고 정리가 다 된 날 동후와 희서는 작은 와인 파티를 했다. 이상하게도 둘 다 모두 행복했다. 정말 낯선 광경인데 익숙해져야 하는 시간을 기대하고 축복하는 파티였다. 희서는 다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동후가 옆에 있다는 게 든든했고, 말벡의 진하고 탁한 붉은색이 희서를 잘 지켜줄 것 같았다.

취기가 돈 희서가 턱을 괴고 조용히 와인잔을 바라보는 동안 동후가 와인을 한잔 더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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