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자욱한 재즈바, 이글스의 노래가 어두운 깊은 곳에 자꾸 가라앉았던 그곳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이면에서 당황하며 들었던 현주의 이야기들이 계속 마음속에 맴돌았다. 현주나 희서나 모두 밝은 곳을 보려고 애쓰는 영혼들이었다. 아니면 그곳에 왜 갔을까.
현주의 조용한 눈물은 꼬냑의 향기를 더 진하게 하는 것 같았다. 잔의 가장자리에서 안쪽을 타고 느릿느릿 아래로 흐르는 꼬냑의 눈물이 현주의 눈물이었다. 현주는 가만히 일어나며 명함을 한 장 주고는 이내 떠나버렸다.
희서는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에스프레소 두 잔에 머릿속까지 바싹 말라버려 한 발짝 옮길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현주가 단호하게 명함을 건네줄 때 희서는 거기서 반사되어 되돌아오는 것 같은 힘을 느꼈다. 현주는 앞으로 더 잘 해내리라.
숙소로 돌아와 뜨거운 샤워를 하고 푹신한 시트 속으로 꺼져 들어가며 가느다란 행복을 느꼈다. 그렇게 하루하루 이어가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희서의 생일 파티를 해준다는 미주의 집에는 미주의 결혼 후 거의 가본 적이 없었다. 작가인 남자 친구, 아니 지금은 남편이 된 성진의 과묵한 압박감이 미주의 근처를 맴도는 것 같았다. 성진은 미주가 있는 곳에서만 행복할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미주가 비혼주의라며 싱글로 살 때의 그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까지 미주의 집은 알맞게 불어넣어 하늘거리는 예쁜 풍선 같았다. 사람 사는 온도라는 게 그런 것 같았다.
어느 때보다 즐거운 파티였다. 미주는 혼자 있을 때는 특별하다가도, 가족으로는 평범한 삶을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그 현재를 누구보다도 잘 즐기는 미주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 희서에게 미주는 언제나 편하게 마음 놓을 수 있는 그런 친구였다. 미주의 특별하고도 평범한 삶은 희서에게 기쁨이었다.
파티에서 동후는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간간이 희서를 보며 미소를 짓는 것 외에는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후의 입을 꾹 다문 모습이 희서를 긴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미주의 아기에게 이마 뽀뽀 볼 뽀뽀를 명랑하게 하고 미주에게 진심의 감사 포옹을 진하게 했다. 미주가 웃고 있었다. 웃는 미주를 보며 희서는 행복했다.
미주의 집을 나서면서 동후는 희서에게 차 한잔 더 하자 했다. 미주의 파티에서 달콤한 후식이랑 마신 커피가 부족했나 보구나 생각하며 희서는 동후와 함께 집으로 와 진하게 홍차를 우렸다. 동후가 희서의 눈을 바라보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랑 매일 같이 있고 싶어."
"그게 무슨..."
"모닝커피도 만들어주고 싶고, 같이 나란히 앉아서 공부하고 싶고..."
"우리 엄청 자주 만나는데? 일주일에 두세 번이나 보잖아."
"그거 말고 매일... 아침에도 저녁에도 잘 때도 네가 있는 공간에 있고 싶어."
희서는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지는 것 같았다. 매일 옆에 있는 동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절친으로 신나게 자주 만나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준하를 사랑하고 준하가 사랑하는 희서를 사랑하기로 했다며 단호하게 말했던 동후의 모습이 떠올라 희서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벌떡 일어났다.
사랑도 아닐 거면서 한 사람 옆에 매일 붙어 있는 게 가능한 걸까. 우정으로 한 사람을 바라보며 사는 게 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었다. 희서는 슬프게 변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게 대답이 될 것 같았다.
조용히 일어나 문을 열었다. 동후는 어떤 말도 더 하지 않았다. 뒤돌아 희서를 바라보며 눈물이 고인듯한 눈으로 얼마간 서 있다가 돌아간 동후의 뒷모습이 너무 무거워 희서는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불안에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