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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by 희수공원 Feb 19. 2025

   "희서찌 오케이해요? 아야 안 해요?"

  

   로아는 내 두 손가락에 난 상처를 매일매일 들여다보며 나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는 이 작은 아이를 걱정시키는 엄마다. 이제는 로아를 돌봐주러 오는 돌보미 아주머니께서 주방일을 거의 다 하신다. 커다란 그릇을 옮기는 일을 빼고는 얇은 젓가락이나 과일 깎는 칼, 포크 같은 것들은 자주 떨어뜨리곤 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었다. 

  

   내 삶의 쓸모가 자꾸 없어지고 있었다. 쓸모가 없어지면 다른 사람이 나를 포기하기 전에 내가 나를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어차피 정해진 끝이니 나의 최선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했다.

  

   시야의 울렁거림이나 흐려짐 때문에 준하의 눈빛을 모두 느낄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었다. 항상 그렇듯 출퇴근의 루틴은 똑같다. 웃으며 다녀오라 다녀왔냐 꼭 허그를 하고 뽀뽀를 하고 가방을 받아 들어 소파 위에 놓은 다음, 벗은 재킷을 스타일러 옷걸이에 넣는다. 

  

   여기까지 하면 준하가 버튼을 누른다. 나를 다시 꼭 안아주고 샤워하러 들어가면 나는 돌보미 아주머니가 챙겨둔 저녁 식탁에 찌개나 국을 따뜻하게 덥혀 조심스럽게 올려놓으면 된다. 오븐레인지의 꼭지 위에 적혀있는 글자를 읽지 않더라도 몇 번째 꼭지가 어느 칸의 불인 지는 익숙하지만 뜨거워진 냄비를 들어 올려 옮기는 것은 항상 긴장스런 일이 되었다. 제대로 살 수 있을까.

  

   "쥬나 아빠는 고기 냠냠, 여미 여미 yummy yummy"

  

   로아는 준하가 밥 먹을 때마다 옆에 앉아 준하의 어머니가 하듯 이걸 먹어라 저걸 먹어라 귀여운 잔소리를 했다. 내가 오디오북을 듣거나 영어로 중얼거리면 로아는 그게 뭔지 끊임없이 묻는다. 그럴 때마다 영어로 이야기도 해주고 손과 몸을 움직이며 온갖 연기를 한다. 

  

   로아는 쉬운 말들과 마음에 드는 영어를 하나씩 천천히 반복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로아가 좋아하는 말은 맛나다는 여미 여미 yummy yummy랑 안아주겠다는 허그 hug다. 억양에 따라 안아주겠다와 안기고 싶다가 달라서 신기하다.

  

   준하와 로아는 잘 지낼 것이다. 어머니와 로아와 집안일을 돌봐주는 착실한 분만 있으면 될 것이다. 채울 수 없는 것은 포기하게 하고 내가 편할 수 있는 최선을 찾기로 했다.

  

   할 얘기가 있다는 나의 말에 준하가 국화차를 만들었다. 국화차는 언제나 그윽한 향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어 좋다. 준하도 내가 어떤 얘기를 할지 대강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눈이 뜨겁고 아플 때 로아를 걱정시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파. 난 눈이 안 보이게 될 거래.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많은 것들이 울렁거리거나 뿌옇고 흐려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자꾸 적어지고 있어. 그런 게 두렵고 불안해. 네 손을 더듬어 잡아야 하는 시간이 올 거라는 게 무서워."

  

   나는 가장 담담하게 목소리를 추스르며 준하에게 말했다.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손은 내가 잡을게. 네가 할 수 있는 것들만으로도 나는 좋아. 네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말이야. 아침에 눈 뜨면 네가 옆에 있는 게 행복해. 내가 일하고 돌아올 때 네가 문 앞에서 내게 팔 벌리고 맞아줄 때 어떤 근심도 다 날아가 버려. 게다가 로아도 너랑 똑같이 팔 벌리고 너랑 경쟁하듯 안아달라고 할 때 너무 기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야. 너와 로아가 내 삶의 이유야."

  

   준하는 나를 꼭 안았다. 나 또한 준하와 로아가 삶의 이유라며 계속 행복해 할 수 있을까. 매일매일 조금씩 큰 방의 붙박이 장처럼 되어가는 처참한 마음을 준하는 모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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