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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운 정리

by 희수공원 Feb 20. 2025

   "집을 팔려고 해.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이랑 합하면 멀지 않은 곳에 마당이 꽤 넓은 전원주택 한 채는 살 수 있을 거야. 로아도 아파트 보다 주택에서 자라게 해주고 싶어. 그레이트 피레니즈도 같이 들이자. 나 아주 어렸을 때 순하고 털이 하얀 강아지랑 뛰어놀곤 했는데 얼마나 쑥쑥 빨리 자라던지 신기했어. 그게 알고 보니 그레이트 피레니즈더라고. 철학적인 깊은 눈도 하얀 털도 정말 멋지잖아. 무엇보다 우리 로아의 정서적인 성장에도 도움이 될 거야. 어때?"

  

   어느 때보다 명랑한 나의 말에 준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트를 팔고 주택을 알아보는 일은 어머니께서 해주기로 하셨다. 집의 위치, 방의 개수와 마당의 크기를 희서에게 전해주시며 같이 상의하며 집을 선택했다.

  

   나는 로아가 커다란 그레이트 피레니즈랑 뛰어다닐 마당을 상상하며 잘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달의 여유를 두고 이사 날짜를 잡고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읽혀주던 영어 동화책들은 그냥 두었다. 나중에 로아가 읽을 것이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사용하던 전공 서적들을 모두 내렸다. 결국 눈 때문에 그만두어야 했지만 많은 애착과 책임으로 강단에 섰던 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로아가 낮잠을 자는 동안 돌보미 아주머니께서 재활용품 모아두는 곳에 책을 내다 놓았다. 가슴 한편이 뭉텅 빈 것 같아 허전했지만 정리는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이사 전에 동후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이젠 더 이상 늦출 일도 아니다. 가여운 동후를 지금껏 모른 척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내가 스러지는 자리에 동후를 초대하는 이기심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앞으로 살아갈 더 행복할 날이 있다고 동후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카페에 마주 앉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모른척하며 지내온 것에 미안해서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동후와 내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거였다. 그래서 동후와 내가 오래 같이 지냈던 나의 아파트가 있는 그곳의 벤치에서 만나기로 했다. 곧 이사를 나가게 될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진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난 이대로도 괜찮아."

  

   동후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자신보다 상대를 더 배려하려는 마음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세상은 많이 변했어, 동후야. 네가 원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준하와 네가 함께 행복하길 바라. 오래전부터 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준하가 너무 욕심나서 모른척했어. 준하는 내 사람이기만 바랐어. 내 앞에 있기만을. 하지만 준하도 너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을 거야. 둘이 오래 만나온 것도 알아. 내가 너무 욕심쟁이라서 벌 받았나 봐. 나는 곧 떠날 거야. 내가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말이야. 새로 이사 가는 곳에는 나는 가지 않을 거야. 그 집은 내가 없는 게 자연스러운 곳이 되면 좋겠어."

  

   동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동후의 마음을 다 알면서도 이제 와서야 이렇게 말하게 된 것에 진심으로 미안했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을 준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동후에게 내가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둘의 관계를 모른척하고 있었다는 게 최선이었을까. 마음이 복잡했지만 시간이 해결하고 있었다.

  

   나는 곧 눈이 보이지 않게 될 것이고 조금이라도 시력이 남아 있을 때 한적한 요양원으로 들어가 그 곳 어느 구석에 붙박이로 있어도 누구에게도 부담을 지우지 않고 마음만은 편하게 지내리라 수속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미 검은 창문이 조금씩 눈 양쪽에서 중심을 향해 닫히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색깔을 포기해야만 하는 절망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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