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전광판은 지금 기온이 2도라며 저녁에는 영하 4도까지 내려갈 예정을 알리며 부산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그렇게 쌀쌀하거나 바람 예보까지 있을 땐 어김없이 그가 주희에게 온다.
일주일 전쯤엔 상관없는 타인이었던 그가 지금은 주희의 주인이다. 어디에 속해있는지 알 때까지 주희가 머물러야 할 임시 보관소다.
지하철 9번 출구 가까이 작은 벤치가 있었다. 주희는 거기에 앉아 정류장의 전광판의 작은 글자 정보를 부지런히 읽으며 세상을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 벤치 뒤로 난 작은 언덕에는 바삭하게 구르는 낙엽들이 바람 따라 서로를 비비며 추위를 피하는 것 같았다.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주희의 머리는 딱 작은 상자 한 칸으로 만들어진 이해하기 쉬운 공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에 흐릿하게 남은 건 서성이며 머릿속이 하얗던 버스 정거장과 붉은 글씨가 너울거리는 정거장 표지판 끝과 맞닿은 하늘쯤의 높이로 달린 LED 전광판이었다.
어떤 버스를 타고 거기에 왔는지 어디가 집이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볼에 흐르다 꾀죄죄한 자국으로 번진 눈물이 그녀 기억의 현재였다. 지하철을 타고 왔을까. 그녀 옆에는 작은 20인치 보라색 하드 케이스 여행 가방만 놓여 있었다. 너무 가벼워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방이었다.
'여기에 왜 왔을까...'
버스 정거장을 두리번거리다 마주친 것은 흐릿하게 들어오는 지하철역이었다. 다시 발을 떼선 안 되는 사람처럼 오래도록 서 있다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벌써 영하로 들어간 바람으로 볼이 시렸지만 하드케이스를 든 손은 이미 꽁꽁 얼어버려 찬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9번이라고 쓰여 있는 지하로 내려가지 못했다.
몸을 되돌려 버스 정거장을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그곳을 떠나면 안 될 것 같았다. 버스 정거장에 다 왔을 때부터 눈이 오기 시작했다. 편안하고 폭신한 눈, 주희의 벤치는 그녀가 누워야 할 영원한 침대처럼 다정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와야 할 곳에 다다랐다며 내리는 눈이 알려주었다.
그렇게 그가 주희의 주인이 되었다. 그의 장소는 버스 정거장에서 꽤 떨어진 한적한 숲 근처였다. 아파트를 앞둔 지하철 역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작은 이동식 주택이었다. 바퀴가 땅에 3분의 2쯤 묻혀있는 건 그곳에 꽤 오래 머물렀다는 의미였다.
어둑해진 지하철 역을 지나다가 벤치에 기대어 눈을 그대로 맞고 있는 주희를 보았다고 했다. 차가워지고 있는 그녀와 얼룩진 볼, 그리고 그녀의 보라색 가방은 그의 트럭 덕분에 다시 온기를 찾게 되었다.
주희는 그가 묻는 여러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생각나는 게 많이 없었다. 정거장... 눈물... 그녀를 알려줄 수 있는 거라곤 그녀 옆에 우두커니 놓여있던 보라색 하드케이스 여행가방이었다.
잠겨진 가방의 키패드에 송곳을 넣어 힘을 주자 잠긴 부분이 뭉텅 뜯겨 나갔다. 찢어지며 갈라지는 가방을 보며 주희는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한 통증을 느꼈다.
가방 안에는 여름 옷가지들과 샌들 한 켤레, 화장품과 작은 단행본 책, 편지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한 겨울의 기억을 뒤로하고 여름이 있는 곳으로 떠나려는 중이었던 것 같았다. 이 작은 나라에는 겨울과 여름이 공존하지 않는다. 여름으로 가는 중이었다가 왜 겨울에 그대로 멈춰 섰을까.
편지 봉투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안 쪽에 작은 메모지 하나가 그녀가 떠나온 곳의 힌트가 되었다.
'나는 당신을 떠나 당신에게 가는 중이야. 내가 닿는 그곳에서 우린 다시 만날 거야.'
어디로 보낼 건지 어떻게 보낼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편지 한 통, 그 또한 주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지 못했다.
그의 이동식 주택의 따뜻한 작은 방에 웅크리고 있다가 뭔가 예감이 들면 서둘러 나가 이곳저곳을 헤매다 결국 우두커니 서 있는 곳은 지하철역 9번 출구 저 앞쪽의 버스 정거장이었다.
아무것도 저장되어 있지 않은 채 잘 살고 있는 것이 가능해서 주희는 눈물이 났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느끼는 주희가 코트 안주머니에 그 편지 메모를 담고 나와 뭔가 기다리는 버스 정거장이 주희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거의 매일 그가 나와 주희를 수거해가고 있었다. 일주일째.
주희의 여름은 어디 있을까. 여름에 머물지도 모르는 주희의 그는 그녀를 기다리다 이미 지쳐버렸을까. 그녀의 소매를 끌어 트럭에 태우고 일주일째 주희의 임시보관소인 그가 안전벨트를 매주는 동안 백미러를 통해 점점 커지는 공항행 리무진 버스를 보았다. 주희는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다음에는 꼭 저 버스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주희의 그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닿아야 할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임시보관소가 주희를 기다릴지는 알 수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