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노을 같은 순간들
둘째는 전형적인 왈가닥이다. 우렁차다 못해 이명을 유발하는 목청, 민첩한 뒤뚱거림, 수백 번도 더 찧은 뒤통수, 과격함에 반응하는 그녀의 말초신경. 그녀가 아들 같은 딸이에요를 설명하기 위한 예시는 수없이 많다. 원체 에너지레벨이 높아 한순간도 가만히, 지긋이 있는 꼴을 본 적이 없다 결단코(첫째와 너무 다른 부분이고 둘이 싸우는 주된 이유다) 둘째의 매력은 사진보다 비디오에 적합하다. 그 역동적인 움직임을 담기 위해선 비디오 녹화가 필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를 감상하며 이 순간은 영원했으면 하는 때가 있다. 바로 웃을 때다.
부모가 되기 전에 선배들에게 종종 들었던 레퍼토리가 있다. 지친 몸으로 퇴근해 집에 들어왔을 때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면 모든 피로가 녹아내려. 삶의 이유를 방금 발견한 것 같은 기쁨과 놀라움으로 또 다른 힘이 솟지. 아기 낳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감정이지. 꽤 동경하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경청했었다. 그러나 일과 육아의 병행이 현실이 되니 그들의 말에 강력한 불신이 튀어나온다. 피로가 녹아내렸다는 그날은 분명 30분도 애를 안 봤을 거야. 젖병을 씻지 않고, 씻긴 후에 다시 응가하지 않고, 눕히자마자 잠들었던 매우 희귀 한 날이었을거야. 그런날 아이의 미소를 봤다면 나도 좋게 반응할 수 있겠지라며 툴툴거린다. 아이의 미소를 보면 좋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힘들고 욱한다. 그날 전까지는.
그날도 한참 피로에 절어서 육아 마무리 단계인(퇴근 후에는 먹이기, 치우기, 씻기기, 재우기로 4단계가 있다) 씻기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서두에서 말했듯 둘째는 목청이 크다. 그냥 큰 수준이 아니다. 파바로티 뺨칠 정도로 커서 평소 귀가 안 좋은 나는 진짜 버티기 힘들다(심하게 소리치는 날은 이명이 들린다) 특히 소리가 울리는 욕실에서 샤우팅을 시전 하면 귀가 아파 짜증이 날 정도다. 그날도 물이 발목까치 차오른 욕조 안에서 짜증 섞인 샤우팅을 시전 했다. 회사격무로 유독 힘들었던지라 그 데시벨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그녀의 주의를 돌려야겠다는 절박함으로 이렇게 외쳤다. 우꽈삐도꺄꽉앜. 뇌를 거치지 않고 만들어낸 천상의 소리가 즉흥적으로 튀어나왔다. 샤우팅 하던 그녀는 3초간의 상황파악 후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가히 천하대장군의 웃음이었다. 그리고 내가 했던 헛소리를 따라 하며 웃었다. 그 순간 나는 그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그냥 이 순간이 멈춰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느닷없는 바람이 내 마음을 댕댕 울렸다. 그 웃음을 다시 보고 싶어서 다시 말했다. 오콱이큣아뻬쿜꽞. 이번에는 케켁 거리느라 평소의 복식발성도 생략하고 생목으로 웃더라. 비디오보다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렇게 목이 아파서 더 이상 못할 때까지 한참을 욕실에서 둘째와 괴랄한 소리를 내며 놀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비디오를 안 찍었더라.
예전에 제주도 노을하늘을 보면서 생각을 한적 있다. 이런 아름다움이라면 영원도 질리지 않겠다. 천국 갈만하겠구먼. 유독 그날 제주도의 붉분홍 노을은 영원 같았다. 그후로도 더 아름다운 풍경과 절경을 봐도 영원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심지어 같은 제주도 하늘도 그때의 감동은 없다) 당일의 온습도, 내 기분, 체력, 정신상태, 함께 있던 사람들 등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져 느꼈던 순간으로 결론 내렸었다.
그런데 그날 아이를 재우면서 제주도 하늘이 떠올랐다. 아 우리 둘째가 웃는 그 순간이 영원한 순간이었구나. 카이로스라 했나.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 즉 크로노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순간들. 둘째가 웃는 순간 카이로스의 시간이 열렸던 거다. 제주도하늘을 감상했던 그 순간처럼. 그 후로 나는 필사적으로 둘째를 웃겼다. 말로도 웃기고, 간지럽혀서 웃기고(요즘 내가 한참 빠져있는 놀이다. 두 팔을 얼굴옆에 붙잡고 턱으로 간지럽힌다) 그녀가 웃어재낄때마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찾아온다. 행복하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영원한 행복이 좀 더 나으려나. 그렇게 반복하다보니 둘째뿐 아니라 첫째의 웃음도 발견한다. 또 다른 카이로스의 시간이 열린다. 매일같이 그날의 제주도 하늘을 감상하는 꼴이다. 나는 복에 겨운 일상 한복판에서 살고 있었구나. 오늘도 두 딸의 웃음을 보는 것이 내게 가장 소중한 순간이다. 아 참고로 하루종일 딸들의 웃음을 보고 있어도 피로는 녹아들지 않고 쌓이더라.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