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하는 날, 평소의 나라면 아홉 시 반쯤 느지막이 일어났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언니가 집으로 오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언니도 재택, 나도 재택인 날이었고 언니 생일 기념으로 좋아하는 음식을 내가 해주겠다며 큰소리를 친 날이기도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닭고기와 양파를 주문했다. 오후 세 시 배송이었다. 아침에 장 본 것들이 오후면 집에 오다니. 좋은 세상이다.
일단 일을 빨리 끝내고 집을 치워야겠다 생각하며, 커피를 내리고 평소보다 이르게 컴퓨터를 켰다. 켜지는 컴퓨터를 보며 오늘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목요일까지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 일단 그걸 11시까지 하고, 밥을 좀 빨리 먹고, 다른 일을 4시까지 하고. 그 뒤에 한 시간 정도 청소를 하고, 언니가 오면 다섯 시쯤 요리를 시작해야지.
하지만 세상만사가 다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갑자기 생각하지 못한 일이 치고 들어왔고, 나는 모든 의욕을 잃었다. 휘리릭 김치볶음밥을 만들어먹고 벌러덩 누웠다. 그때 언니한테 카톡이 왔다.
"여기 생각보다 일이 잘 안 된다. 좀 일찍 너희 집으로 가도 돼?"
잘됐다. 언니라도 있으면 일을 하긴 할 것 같았다. 물론 청소도 다 못했고, 세수밖에 못했지만 언니는 이해해 줄 것이다.
추레했던 나와 달리 언니와 집으로 오며 본 벚꽃은 너무 예뻤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모자를 뒤집어쓴 나를 보고 언니는 놀라지도 않았다.
"역 앞에 딸기가 맛있어 보이길래 조금 샀어."
언니는 양손에 딸기를 두 팩씩 들고 있었다.
"조금이 네 팩이야? 손 엄청 큰걸."
"직접 요리해준다는데 이정돈 사 와야지."
B 책상에 언니 자리를 마련해 주고, 언니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각자 일을 했다. 언니가 옆에 있으니 어쩐지 더 잘되는 기분이었다.
퇴근 시간까지 꽉꽉 채우고 일한 뒤 요리를 시작했다. 손이 엄청 큰 나는 또 엄청난 양을 만들었지만, 고맙게도 언니는 정말 맛있게 먹어주었다. 언니가 사 온 딸기를 함께 먹고 있었는데, 언니가 갑자기 고맙다는 말을 했다.
"A야, 이번 생일 선물 진짜 고마웠어. 우리 집이랑 딱 어울리더라고. 이번에 새로 산 소파 옆에 두니까 딱이야."
"잘됐다. 딱 그 위치 생각하고 산거다? 언니네 집이랑 어울릴 것 같았어."
얼마 전 언니의 생일날 나는 장고 끝에 석고 방향제를 선물했다. 언니가 좋아하는 캐릭터, 언니가 좋아하는 향, 언니가 좋아하는 색을 가진 완벽한 언니 취향의 방향제였다. 언니는 손수 찍은 인증샷까지 보여주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 맛에 선물하는 거지.
"언니, 형부(남자친구)랑 생일파티 했어?"
순식간에 언니 얼굴이 빨개졌다.
"뭔데, 뭐 프로포즈라도 받았어?"
"그건 아니고, 그냥 너무 행복했어."
지난 주말, 언니는 형부와 백화점에 다녀왔다고 했다. 거기 있는 모든 매장에 들어가 모든 운동화를 신어본 뒤 언니가 딱 필요했던 운동화를 한 켤레 샀다고 했다. 그날만 보 넘게 걸었어라며 푸흐흐 웃는 언니의 얼굴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언니의 지난 연애가 떠올랐다. 매번 언니에게 비싼 선물을 사주던 그 사람. 언니는 구두를 신지 않는데 명품 구두를 사주고, 언니가 들지 않는 스타일의 명품 가방을 사주고, 언니가 흥미 있어하지도 않는 각종 기계를 사주던 그 사람.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물건을 정리할 때 언니는 좀 슬프다는 말을 했었다.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선물을 고를 때 자기는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땐 언니를 위로한답시고 그래도 언니를 사랑했으니까 이런 비싼 걸 사줬을 거야라고 했었는데.
신이 나서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언니를 보니 그때 언니가 무슨 마음이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자기 신발을 사는 것처럼 신경 써 줘서 사줬다는 운동화는 이전 사람이 사줬던 무수히 비싼 물건들보다 언니에게 더욱 값지고 소중한 존재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가. "너도 그렇고 남자친구도 그렇고 너무 다정해."라며 내가 사준 선물도 마음이 느껴져서 좋았다는 말이 더욱 기쁘게 다가왔다.
언니가 돌아가고 나서 문득 궁금해져 B에게 물어봤다.
"내가 사줬던 선물 중에 제일 기억에 남았던 건 뭐야?"
"음, 블루투스 키보드."
"왜? 가장 비쌌던 건 가방이었는데. 키보드 비싼 것도 아니었잖아."
"가격도 가격인데, 그때 블루투스 키보드 진짜 필요했거든. 그리고 그때 기념일도 아니었는데, 자기가 필요할 것 같다며 갑자기 선물해 줬잖아. 그때 진짜 감동했던 것 같아."
빨강머리 앤에 나온 말 중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누군가를 생각해서 하는 선물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남이 보기에 거창하고 값비싼 선물보다 나에 대한 관심이 차곡차곡 꿰인 다정한 선물이 더 비싼 값어치를 지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