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슬쩍 꺼내 본-탈출하던 날

6. 탈출하던 날

by 해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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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할아버지는 갑자기 원치 않는 폭탄을 떠안게 되었다.


사십여 가구가 사는 이 동네에서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숟가락 개수나 젓가락에 새겨진 무늬를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기 때문에 동네에는 구멍가게 하나조차 없었다. 몇 달씩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집안 한쪽에 공간을 마련하고 가게를 한다. 가게라고 해봐야 하나에 10원 하는 알사탕이나 쫄쫄이 과자, 그리고 가장 중요한 탁주를 들여놓고 판다. 수익성은 당연히 거의 없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장터에서 탁주를 몇 말씩 가져다 놓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전에 살던 더 작은 동네, 밤티에서는 이런 가게도 없었다. 밤티에는 15 가구 정도가 다였다.


할머니, 그리고 20살 가까이 나이 차가 나는 할아버지는 이 신흥리에서 오랫동안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왔다. 가끔 할머니가 바로 이웃집 60대 초 할아버지에게 눈웃음을 치는 것 빼고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해 겨울, 첫째 아들이 조강지처와 이혼하더니 애들 네 명을 한 번에 보낸 것이다. 할머니는 자기 아들의 자식들이었지만, 50대 젊은 할머니로 손자들이 그다지 예뻐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화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쏟아졌다.

“경미, 니는 누굴 닮아서 이리 못돼 처먹었노? 이 쌍놈의 가시나!”

“수나, 이 병신 같은 년, 손병신에 오줌까지 쳐 싸나?!”

할머니는 온갖 가학적이고 원초적인 혀의 폭력으로 우리를 후려쳤다.


그 시골에는 눈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왔다. 어차피 차도 안 다니는 곳이지만, 신작로와 양옆으로 펼쳐진 논밭, 그 뒤쪽으로 이어지는 산, 그 어느 곳도 온통 하얗게 뒤덮였다.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쌓였던 맨 층, 얇은 눈가루들이 마구 일어나 이리저리 날려서 눈을 바로 뜰 수 없을 정도였다.


하필이면 언니는 왜 이런 날을 작전의 그날로 잡았을까. 야속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진 구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언니와 나에게 집안일을 다 시켰고, 밥은 아깝다며 조금 주었고, 때리기도 했다. 내가 볼 때는 쌀이 조금 더 나가는 것 말고는 할머니에게 훨씬 이익이었다. 어차피 자기가 하던 빨래도 우리가 다 했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도 우리가 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온종일 빽빽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고,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손찌검을 해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막내 남동생은 아직 아기였고, 장손이라고 따뜻한 밥과 고등어 반찬을 챙겨줬다.


언니는 막내 남동생을 포대기로 업고 작은 보따리 하나를 손에 들었다. 나는 제법 큰 보따리를 들었다. 그리고 수나의 오므라진 작은 오른손을 잡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오후가 되자 윗마을에 마실을 다녀오신다고 했다. 아마도 오후 세 시가 조금 못되었던 것 같다. 탈출 시작!


우리는 부지런히 걸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겨울, 허벅지까지 파묻히는 눈길을 장화 대신 낡은 운동화를 신고 걸어가는 일은 십여 분 정도는 괜찮았다. 한참이 지나고 우리의 걸음 속도는 점점 더 떨어졌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은 발갛게 얼어가고 있었고, 손발이 너무너무 시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도 이도 다 얼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온통 눈으로 뒤덮여 길인지 농수로인지 알 수 없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길옆으로 움푹 팬 농수로로 빠질 수도 있다는 조바심까지 나서 한 걸음 한 걸음은 더욱 더디게 움직였다. 수나를 잡았던 손이 너무 시려 잠시 놓았다. 수나는 몇 발 못 가서 앞으로 넘어졌고, 조금 앞서가던 언니는 뒤를 쳐다보고는 소리를 쳤다.

“해달이 너, 뭐 하는 거야. 빨리 수나 데리고 오라고!”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귀까지 칭칭 감았던 목도리는 이미 내려와 있었고,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같았고, 매서운 바람 소리 같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언니의 마음이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이 어린 동생들이 생각처럼 움직이질 못하고, 우리는 한참을, 한참을 더 가야 하는데, 산골 마을 그날의 저녁은 유난히 더 빨리 어두워지는 것 같았는지를.


정말 정말 한참이 지나고 드디어 우리는 장터에 도착했고, 언니는 첫째답게 믿음직스럽게 우리를 데리고 보은으로 나가는 버스를 찾았다. 우리가 얼어버린 손을 비비고 호호 불고 있는 동안, 언니는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간곡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저, 저희가 돈이 좀 부족해요. 그래도 제발 태워주시면 안 될까요?”

언니의 눈물이 흐르는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고, 기사 아저씨는 버스의 문을 닫았다. 어젯밤 언니가 나에게 가진 돈을 다 줘보라고 했고, 나는 몰래 필통에 넣어 두었던 삼백 몇십 원을 건네줬다. 언니가 가지고 있던 돈과 합쳤지만, 우리 네 명을 받아줄 돈은 아니었나 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맥이 빠졌다. 갑자기 너무 졸렸고, 귀가 멍해지고, 다리에 힘이 없어졌다. 언니는 우리에게 버스 바퀴 자국을 따라가자고 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눈보라는 조금 잠잠해졌다. 그런데, 주변이 조금 어둑어둑해진 것 같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잠시 우리가 걸어온 길을 가늠하려고 뒤돌아봤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이지. 저 멀리서 회색빛 그림자가 정말 바람처럼 축지법을 쓰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언니! 저기, 저기 할아버지야! 얼른 도망쳐야 해!”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다리를 들어 올렸다. 아니 이제, 쌓인 눈을 마구 차면서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언니는 나를 향해 뭐라고 계속 소리쳤고, 울고 있었고, 순식간에 할아버지는 언니에게 귀싸대기를 날리고, 수나랑 나는 소리치며 할아버지 손을, 다리를 잡았다.

“언니 때리지 마요! 할아버지! 잘못했어요! 우리 언니! 우리 언니 때리지 마요!”

우리 4형제의 탈출은 가슴 아프게도 비참하게 실패했다.


- 에필로그:

탈출하던 날을 다시 떠올리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한 글자 한 글자가 힘겨웠다. 눈물이 났고, 묘사한다고 묘사되지 않는, 그날의, 숨이 막히고 심장이 아직도 아파져 오는, 사실이 아닐 것만 같은, 그런 날이었다. 아홉 살 소녀가 담을 수 있는 기억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평생 생생하게 기억하고 힘들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지금 담담하게 나는 그날을 말할 수 있고, 이제 눈이 내리는 날에 그날이 생각나도 괜찮아졌다. 그 버스 기사 아저씨는 왜 우리를 거절했을까. 사실, 나는 그때 그 버스 기사 아저씨가 할아버지와 아는 사람이라고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할아버지가 어떻게 우리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고 뒤쫓아 왔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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