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슬쩍 꺼내 본-겨울, 눈꽃이 눈물이 되던

5. 겨울, 눈꽃이 눈물이 되던

by 해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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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어둑어둑 급하게 밤이 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집에 없었고, 8시가 넘어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던 아빠가 오랜만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쩐지 아빠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서랍에서 성급하게 뭔가를 꺼내서 11월 외투 안쪽으로 넣었다. 그리고는 왼손에는 전축, 오른손에는 TV를 집어 들었다.

“아빠 간다.” 이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전축과 TV와 함께 더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9시가 넘어 엄마가 들어왔다. 분노와 충격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추격자의 그것처럼 다급하게 보였다.


며칠 후 국민학교 2학년인 나를 포함한 우리 4형제는 아빠가 어떤 여자와 바람났다는 사실, 그 여자와 야반도주했다는 사실, 엄마가 그 둘을 고소해서 바로 잡혔고, 아빠는 대전교도소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겨울이 되고, 아마도 엄마는 몇 달 동안 교도소에서 아빠를 빼내려던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삼촌, 고모에게 시달렸던 것 같다. 나는 직관적으로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가 곧 떠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밤, 계속되는 이별에 관한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엄마, 언니, 수나, 그리고 막내 남동생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낮에 미리 준비했던 분홍색 보자기를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속옷 몇 가지, 양말 몇 켤레, 그리고 겨울옷 한 벌. 한 짐이면 충분했다. 그 보따리를 꼭 껴안고 문 앞에서 잠이 들었다. 날이 밝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엄마의 눈과 마주쳤다.

“해달이, 너, 이게 다 뭐야!”

“엄마, 난, 엄마 따라갈 거야. 배고파도 되고, 뭐 안 사줘도 돼. 그냥 엄마 옆에 있을 거야. 짐도 다 쌌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나를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엄마 아무 데도 안 가. 그러니 짐 풀어. 얼른 밥 해줄게.”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곧 떠날 것을.


겨울방학 하는 날. 일찍 끝나고 나는 서둘러 집으로 왔다. 대문을 열고, 방문을 열고, 집은 휑했다. 모든 것이 정리된 후였고, 엄마는 없었다. 나는 맨발로 대문을 열고 정신없이 뛰어나갔다.

“엄마! 엄마!”

하늘에서 눈꽃이 날리기 시작했다. 내 머리에, 내 얼굴에, 내 눈 속에 떨어졌다. 하얀 눈송이, 눈꽃은 내 눈 속에서 눈물이 되었다. 분명, 차가운 눈꽃이었는데, 이제 뜨거운 물이 되어 내 뺨을 흐른다. 내 두 손은 추위로 발갛게 상기되었는데도, 이상하게 눈물은 뜨겁게 흘렀다.


그날 저녁, 아빠는 우리 4 형제에게 짐을 싸서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에필로그 :

벚꽃이 한창인 봄이면, 꿈꾸듯 날리는 벚꽃잎들은 언젠가 그 겨울에 하염없이 날리던 눈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러면 정신없이 맨발로 대문을 열고 뛰쳐나가 목이 다 쉬도록 돌아오지 않을 엄마를 외쳤던 아홉 살 소녀가 생각난다. 지금은 괜찮겠지, 그렇게 다짐해도 눈가에 고여버린 눈물은 슬픔 없이 그저 생채기가 되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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