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슬쩍 꺼내 본 - 엄마, 아빠, 그리고 벽시계

3. 엄마, 아빠, 그리고 벽시계

by 해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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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열여덟에 팔려 오다시피 시집왔다고 했다. 아빠는 열여섯. 아빠의 엄마, 즉, 친할머니는 할아버지와 20여 년 가까이 나이 차이를 두고 재취 자리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아빠와 삼촌, 고모를 낳았다. 아빠는 할머니와 쏙 빼닮았는데, 특히 성격은 판박이라고 했다. 그 성격이라는 것이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할머니는 틈틈이 이웃집 건장한 남자들에게 웃음을 흘렸고, 할아버지는 모른 척했다.


아빠는 성격이 불같고 난폭해서, 지금 생각해 보면 잘 못 배워서 자신의 마음을 잘 못 표현했던 것 같다, 술을 마시고 저녁부터 엄마를 때렸다.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해서 마구잡이로 때렸다. 발로 엄마의 머리를 차고, 마지막엔 우리 집에서 돈이 조금 나가면서 소리 효과가 좋을 것 같은 벽시계를 집어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시계는 ‘퍽’하고 바닥에 닿는 순간 폭삭 깨졌고, 그것을 윗방에서 숨어 바라보던 우리 세 자매의 마음도 폭삭 깨졌다. 세 살 위 언니는 나에게 다급히 속삭였다.

“해달아, 얼른 수나 손잡아. 길수네 집으로 도망갈 거야.”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런 날들은 대전으로 이사 가고, 횟수가 점점 줄었던 것 같다. 대전은 그 까마득한 시골과는 다른 곳이었다. 열 가구 정도가 한 곳에 모여 살았고, 마당에 펌프 대신 수도가 있었다. 뒷간은 일렬로 늘어선 집들이 끝나는 지점 그야말로 집 뒤쪽으로 두 칸이 있었다. 아마도 옆집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주 벽시계를 깰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다행이었다. 엄마의 머리가 폭삭 깨지기 전이었으니까.

엄마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둘째였다. 아빠는 엄마를 보고 반해서 엄마랑 혼례 치른다는 소문을 내버리고, 할머니를 꼬드겨 상견례 상을 준비했다. 엄마랑 외할머니가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친할머니는 상견례 상 준비한 값과 동네 창피한 값을 치르라고 협박했다. 그렇게 가난했던 엄마는 그렇게 말도 안 되게 아빠랑 살게 되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처음에만 엄청나게 잘해준 것 같다.


엄마는 젊은 시어머니의 횡포를 다 견디고, 살림하고, 농사일하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동네에서 손이 야무지다는 칭찬을 듣고, 김치를 끝내주게 맛깔나게 담아서 김장하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바가지를 들고 와서 줄을 섰다. 애들을 줄줄이 낳았지만, 첫째 아들은 아파서 먼저 가버렸고, 이후 딸을 낳자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마를 구박했다. 그리고, 다시 임신했지만, 아빠가 시계를 깼고, 유산했다. 아들을 기다렸던 시부모는 남자 동생을 죽였다며 언니를 미워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한여름에 태어난 나는 태열이 심했고, 환영받지 못한 곧 죽을지도 모르는 여자아이였다. 머리카락은 부스럼 종기 진물로 엉겨 붙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썩는 냄새가 난다고 난리 치며 지독히도 엄마를 구박했다. 엄마는 포대기로 나를 업고 자신의 발갛게 부은 손을 비비며, 추운 겨울날 밖에서 죄인처럼 오랫동안 서성였다. 엄마는 이런 집에서 더 이상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지만, 대를 이어야 하는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만 했다. 셋째도 딸이었다. 셋째를 가졌을 때, 아빠는 ‘부정 탄다’는 개고기를 먹었다.


부정 탄다는 말과는 달리, 수나는 얼굴이 뽀얗고 이쁜 아기였다. 살결이 너무 보드랍고 너무 보드라웠다. 그러나 수나의 너무 보드라운 살은 약간의 뜨거움도 견디지 못했다. 아니 미지근한 방바닥인데도 수나의 연약한 살은 화상을 입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엄마는 그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조심했고, 또 조심했다.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어느 혹독한 추위가 찾아온 겨울날, 수나는 잠자고 일어났더니 움켜쥐고 잔 오른손을 영원히 펼 수 없게 돼버렸다. 그리고, 억세고 무식했던 시부모는 수나를 ‘병신’으로 불렀다. 가끔은 ‘병신 같은 년’이라고 했다. 엄마는 수나가 ‘병신’이 된 것이 모두 아빠가 먹었던 개고기 때문인 것 같았지만 꾹꾹 누르고 누르며 살 수밖에 없었다.


대전으로 이사 가고,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해 엄마는 막내 남동생을 낳았다. 드디어 이 집에서 대를 이를 아들을 낳은 것이다. 아빠는 여전히 한 번씩 벽시계를 깼지만, 주변에 더 많은 집들이 둘러싸고, 횟수는 더 줄어들었다. 전신전화국 근처 집으로 전세를 얻어 살게 되고, 아빠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돈을 벌러 갔다. 그 사이 엄마는 학교 근처에서 풀빵 장사를 했고, 우리는 밤 8시가 넘어가면 팔다 남은 국화 모양의 풀빵 몇 개와 떡볶이, 오뎅을 먹을 수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오는 날까지 막내 남동생을 포대기로 업고 오전엔 집안일을 하고, 오후엔 풀빵을 팔았다. 우리 집에는 TV와 전축이 생겼다.


- 에필로그


TV에서 ‘고등엄빠’를 본 적이 있다. 고등학생 나이에 엄마, 아빠가 된 아이들. 열일곱, 열여덟이면 지금은 청소년이라고 부른다. 내가 살던 그 시절, 그 동네에서는 시집, 장가갈 나이였다. 아직, 자신의 정체성도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을 그 나이에 엄마, 아빠가 되어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한다는 것은 훨씬 더 가혹할 수도 있고, 전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나이가 다는 아니지만, 비교적 나이가 있는 성인들에게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어 감당했을 엄마, 아빠의 삶의 무게를 조금은 이해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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