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 상경 후 첫 직장생활

by 도이진

졸업 후 본가로 내려오던 날,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가 마음을 조금 벅차게 했다. 다시 부모님과 지내게 된다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아련했고, 또 살짝 따뜻했다. 잠시 떠났던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본가 생활은 생각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나와 아버지 사이의 간격은 하루하루 조금씩 벌어졌고, 작은 마찰로 이어졌다.


아버지는 내가 집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만을 드러냈고, 나는 그 기대에 맞추어야 한다는 조급함 속에서 조용히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충고는 충고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반발하고 싶은 마음만 커졌다. 오랫동안 보호받던 자리에서는 이런 작은 갈등조차 크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언쟁은 잦아졌고, 그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닳아갔다. 반복되는 혼남 속에서 ‘이제는 여기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천천히 자리 잡았다.


그즈음 어머니가 조심스레 물었다. “외사촌들이 서울에 올라가는데… 너도 같이 살아볼래?” 그 말은 마치 숨이 트일 만한 곳으로 들어가는 문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쉽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서울은 새로운 시작이었고, 새로운 시작은 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내가 더는 여기 머물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는 곳은 내가 고를 수 없었다. 사촌언니가 전화로 말했다. “디오소리야, 청구역 근처로 계약될 것 같아!” 그렇게 서울 중구 신당동의 오래된 연립주택이 내 첫 상경지가 되었다. 짐을 싸며 ‘내가 이렇게 짐이 많았나…’ 하고 중얼거렸다. 아무리 줄여도 줄지 않는 짐들을 콜밴에 싣고 고향을 떠났다. 무겁던 짐조차 그날은 이상하게 ‘새로운 시작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서울에 도착해 언덕 위 연립주택으로 들어서던 순간, 정말 새로운 삶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중이라는 걸 실감했다. 방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 비어 있음이 주는 기분은 묘했다. 자유 같기도 했고, 허전함 같기도 했다. 물질이 아니라 마음의 안락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 처음 알았다.

사촌언니와 나는 어른들이 떠난 뒤 며칠 동안 마치 어린애처럼 서툴렀다. 어머니는 몇 달간 생활비를 보태주시겠다고 했고, “그다음은 스스로 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가진 무게를 온전히 알지 못한 채였다.


어른들이 돌아간 뒤, 나는 우물 속에서 겨우 밖을 올려다보는 개구리처럼 좁은 공간에 머물러 있었다. 부모님의 울타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막막함만이 남았다. 그 와중에도 일자리를 찾기 위해 면접장으로 향했다. 면접에 들어설 때마다 낯섦과 긴장 속에서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는 능숙했고, 누군가는 당당했지만 나는 그저 그 자리를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원의 대형 문구점에서 합격 연락이 왔다. 그 소식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새로운 시작이란 늘 두려움과 안도가 같이 오는 법이었다. 펜 파트에 배정되어 일주일간 교육을 받았고, 조금씩 익숙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여전히 낯설었다.


그러던 중 직장 내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나보다 일주일 먼저 들어온 남성 직원은 경력과 나이를 이유로 텃세를 부렸고, 퇴근 후에는 불편한 메시지들을 보냈다. 그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내 마음을 쉽게 흔들었다. 참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부장님이 나를 불렀던 날, 그는 내가 성실히 일해왔음에도 다른 직원들의 말만 듣고 나를 꾸짖었다. 그 말들 앞에서 내 노력은 너무 쉽게 지워졌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는 기분이었다. 목소리는 닿지 않았고, 나는 조금씩 더 지쳐갔다.


서울에서의 첫 생활은 기대보다 훨씬 거칠었다. 도시는 빠르고 복잡했고, 마음은 늘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사람도 많고 기회도 많다지만, 정작 내가 설 자리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좋음보다 나쁨이 먼저 다가오는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