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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Jun 21. 2023

사랑의 세 가지 정의

포스트코로나시대의 메타픽션

     *치욕


   여대에 들어간 친구 현이가 과대표가 되어 제일 바쁘게 준비한 것은 옆에 붙어 있는 제비가 많기로 소문난 대학의 공대생들과 미팅 주선이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인연이란 그런 것일까? 아저씨는 바로 그 학교 출신이었고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며 연구 조교를 하고 있었다. 이제 대학에 왔고 자유로운 삶이 시작되었으니 아저씨와의 만남은 순풍을 만난 돛 단 배처럼 유유히 흘러가리라. 부모님의 성화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내가 다니는 대학과 별로 멀지 않은 현이의 여대에 일주일에 한 번은 놀러 가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여자 애들이 다니는 학교라서 교문부터 향기로운 냄새가 풍겼다. 그 당시 하늘은 평온하고 행복했다. 공간의 푸릇함이 숨 쉴 때마다 내 폐로 들어와 앞으로 펼쳐질 내 미래에 울렁거림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기분이었다. 뭐가 그리 설레고 희망차던지...... 어느 날 현이는 몹시 당황하며 내게 부탁을 했다. 옆 대학의 산업 공학과와 6시에 미팅을 하기로 했는데 친구 하나가 사정이 생겨 나오지 못하니 날 보고 대신 나가 달라는 부탁이었다. 

    “난 너희 학교 학생도 아닌데?” 

    “어때? 그냥 우리 학교라고 하고 한 번만......”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고 아저씨를 약 올리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치밀었다. 질투만큼 강렬하고 짜릿한 담론이 있을까? 졸업 실험 연구 때문에 한 동안 우리 집에 오지 않았던 아저씨도 볼 겸 친구에게 아저씨를 먼저 찾아 가지고 졸랐다. 서두르지 않고 즐겁게 누리며 우리의 사랑을 키우고 싶었다. 핸드폰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고 연구실로 전화를 거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기에 그냥 공대 건물을 향해 친구와 터벅거리며 걸어갔다. 그를 만나던 못 만나던 아무 상관이 없었다. 미팅을 하기로 하고 그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짜릿했다. 그의 학과 명패가 붙은 연구실 앞에서 노크를 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왔고 들어가 보니 대여섯 명 정도 되는 대학원생들이 커다란 책상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중이었는데 메뉴는 컵라면과 빵이었다. 실험 중이었는지 하얀 가운을 입은 아저씨도 그들 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는 나와 친구를 보자 얼굴이 붉어졌다. 놀라고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지만 두터운 안경 너머로 좋아서 반기는 기색이었다. 그들은 뜻밖의 여대생들의 방문을 받자 모두 흥분했다. 큰 소리로 웃으며 현이와 나를 서로 자기 옆에 앉으라고 권하며 물도 떠다 주고 라면과 빵도 챙겨 주었다. 

   “6시에 요 앞에서 미팅하기로 했어요. 현이네 과 여학생 한 명이 펑크를 내서 내가 대신이에요.”

   “그래?”    

아저씨는 수줍게 미소를 띤 다음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무감각한 느린 말투로 대답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라면만 먹었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마치 빽빽한 글이 차있는 종이처럼 느껴졌다.

   “6시에 만나니까 8시까지 이리로 와라, 집에 데려다줄게!”

그는 왜 내게 미팅에 나가지 말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걸까? 듣고 싶은 말은 바로 그것인데...... 내가 그에게 너무 큰 요구를 하고 있나? 순간 무언가 가해한 것 같은 아련한 죄책감이 나른하게 피어올랐다.    

    그날 입고 나간 옷은 크림색 블라우스와 파란색 잔 꽃들이 치마 가장자리에 서양화처럼 펼쳐진 플레어스커트였다. 블라우스 허리춤에는 작은 리본이 뒤로 길게 묶여있어서 장난치는 친구들이 등 뒤에서 리본을 풀기 일 수였다. 컵라면을 먹고 현이와 돌아가는 나를 문간까지 따라 나오던 아저씨가 끈이 풀렸다며 주의를 주었다. ‘조심하고.....’라고 말했는데 그 말에 이상한 중압감이 느껴졌다. 랑데부라는 찻집에서 일곱 명의 공대생들을 만났다. 어떻게 짝을 정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고 여하튼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그 찻집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저씨가 두 시간밖에 주지 않았기에 학교 근처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상대 남학생은 나보다 두 살이 많은 3학년 오빠였다. 곧 있을 기숙사축제에 파트너가 필요해서 미팅에 나왔다고 얘기를 하는데 경상도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찻집의 음악소리도 볼륨이 높았기에 나는 도무지 그 오빠와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말끝마다 “으라차차......”라고 토씨를 부쳐대는 바람에 무슨 아프리카 원주민과 앉아있는 듯 환각이 들었다. 그는 까만 피부에 눈은 사슴처럼 동그랗고 코와 입이 로마군을 연상시키듯 조형적으로 길었다. 내게 이것저것 한 참을 물어보고 웃기도 했지만 내가 보기엔 얼이 빠진 듯 보였다. 예의를 지켜야 했기에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계속 딴생각을 했다. ‘내가 아저씨를 자극하기 위해 너무 한심한 선택을 했구나. 세상엔 저렇게 이상하게 말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이름이 김 봉달이라니, 빨리 친구들을 만나 저 이름을 얘기해줘야 하는데.....’ 그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왜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개를 끄덕이다가 시계를 보았다. 8시 38분이었다. 아저씨가 오라는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하지만 전혀 걱정이나 조바심은 들지 않았다. 그는 나를 기다릴 것이고 이제 새초롬한 거만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다가 활짝 웃으며 팔짱을 끼고 집에 데려다 달라고 응석을 부리면 그뿐이었다. 나의 이런 행동에 그는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질 것이지만 침묵 이외에는 아무 공격도 하지 않을 것이다. 밤의 캠퍼스를 아저씨와 함께 걸을 생각에 마음이 들뜬 나는 서둘러 경상도 사나이와 작별을 했다. 길고 긴 하루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서둘러 잰걸음으로 공과대학 연구동 앞에 도착했을 때 몇몇 강의실 빼고는 모두 불이 꺼져 있음을 알았다.

  ‘어? 왜 이렇게 깜깜하지?’ 시계를 보니 거의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3층 그의 실험실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희미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럼 그렇지...... 나를 오라고 하고 먼저 가지는 않았겠지......’ 3층으로 올라가서 노크를 하려다가 그냥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다. 연구실 안은 회색빛 적막이 돌고 저 멀리 책상 스탠드에서 희미한 전구가 빛을 발하고 있는데 책상에 엎드려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대상이 아저씨의 뒷모습이 아니었다. 순간 어떤 낯 선 곳으로 잠시 유체 이탈을 한 듯 아련한 공포가 밀려왔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후 또박또박 걸어가 책상 위를 노크하듯 두드렸다. 노크 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게 “누구세요?”라고 물었고 나는 희미한 대상에게 아저씨의 이름을 말하며 “낮에 왔었는데 벌써 집에 갔어요?”하고 개미소리로 물었다. 왠지 모멸감이 느껴지며 속상한 기분이 밀려왔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아저씨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나가 버린 것이다. 당황하고 불쾌한 마음에 잠시 서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캄캄한 공간이 내 머릿속과 조도가 일치하는 듯했다. 갑자기 찌를 듯 신경질이 밀려왔다. 나는 아저씨의 책상 쪽으로 걸어가 불을 켜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낯익은 책들이 꽂혀있고 헤세의 ‘지와 사랑’도 원서들 사이에 박혀 있었다. 그가 펼쳐놓은 스프링 연습장엔 알 수 없는 수학기호들이 즐비하게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나는 펜을 들고 내일 아침이면 그가 펼쳐볼 새하얀 면에 ‘한 시간도 못 기다려요?????....’라고 수많은 물음표를 찍었다. 물음표 하나마다 원망과 기분 나쁜 감정을 담아서 진하게 눌러썼다. 거의 반 페이지 가량을 물음표로 도배를 하며 앉아 있는데 검은 그림자가 연습장 종이 위로 비치었다. 


옛날 옛적에 절대로 웃지 않는 한 공주가 살고 있었지. 그 공주는 너무나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부왕은 자신의 아리따운 공주가 한 번이라도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 애가 탔단다. 우스꽝스러운 광대들을 초대하고, 신나는 리라를 울리고, 이웃나라의 재주 부리는 곰들을 데려다 공주의 환심을 사려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지. 왕은 고심 끝에 온 나라에 벽보를 붙였어. 

  “누구든지 나의 공주를 웃게 하는 이는 이 나라 영토의 반을 주고 부마로 삼겠다.” 

이 벽보를 보고 수많은 기사들이 공주를 웃기러 궁전으로 몰려들었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할 수가 없었다. 그저 새하얀 시멘트바닥이 천정 위에 매달려 덮칠 듯 나를 내리누르는 압박감과 입술에서 피가 흐르는 심한 통증...... 그게 다였다. 불쾌한 냄새가 얼굴과 목을 타고 온 세상을 홍수로 삼켜 버릴 것처럼 넘쳐흘렀다. 어지럽고 메스꺼웠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반항도 사유도 내게 허락된 영역이 아니었다. 그저 바퀴 달린 책상의자가 뒤로 제켜지며 그대로 고꾸라진 상태에서 야수 같은 힘으로 한 물체가 내게 침투했다. 나는 의자가 바닥으로 넘어질 때 쿵하고 머리를 부딪쳤고 잠시 몇 초간 정신을 잃은 듯 내 육신을 조종할 능력을 상실했다. 뜨거운 혀가 입 속으로 뭉클거리며 들어왔고 뒤이어 거친 손이 블라우스 안쪽을 할퀴었다.‘이게 뭐지?’하고 정신을 차린 순간 노란 손전등 불빛이 나를 비추었다. 검은 독수리가 내 몸을 순식간에 덮쳐 그 부리로 생채기를 내고 후다닥 날아간 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봐, 학생... 괜찮아요? 머리 안 다쳤어요?”

경비 아저씨였다. 뒤이어 쿵쾅거리며 검은 독수리는 날아가 버렸다. 나는 수치심과 공포심 때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중천에 두 달 뜨면


    무릎을 꿇고 할머니 앞에 엎드리며 나는 두 손을 조아리고 간절히 울며 호소했다. 

   “할머니.... 아저씨랑 인연 맺게 해 주세요. 그 사람이 좋아요. 마음이 가요......”

    할머니께서는 나를 똑바로 쏘아보며 돼 물으셨다.

    “뭬가 좋은 고?”  

    “명정히 생각하거라......”

    “그 뻘건 도깨비가 뭬가 그리 좋으냐 물었느니라.”

너무나 서슬이 퍼레서 노려보시는 외조모님을 보니 겁이 났다.

    “그 사람이 좋아요. 같이 살고 싶어요. 따뜻해요. 몸이 떨려서 기분이 야릇해요. 그냥 매일 보고 싶고 생각나요. 할머니 제발!”

     할머니께서는 나를 바라보시다 말고 눈을 감으셨다. 긴 한숨과 침묵 그게 다였다. 공적한 공포감에 휩싸이며 두 눈방울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할머니..... 그 사람을 사랑해요.”

소리도 내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나를 외면했던 할머니가 잠시 허공에 눈을 두다가 천천히 말문을 떼셨다.

      “아가...... 이 할미가 옥루몽을 긴 날들을 거쳐 이야기해 준 다음 무어라 했느냐?”

할머니가 무슨 말씀을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승엔 사랑이란 없다. 그저 지나가면 먼지보다 못한 남녀상열지사가 있을 뿐이야. 그건 인간들이 붙여놓은 삿된 감정이야. 이승엔 욕정이 있고, 환이 있고, 삶의 마야가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시간이 간다는 것이야. 그러니 그런 하찮은 것으로 네가 누릴 수 있는 삶의 향유를 곤궁하게 하면 되겠느냐? 우주의 도와 신을 잃어서는 안 되지. 늘 말하지 않았느냐?”

      “그놈과는 인연이 아니야, 너를 훼손시키는 궁합이야. 좋지 않아...... 이 할미는 신이 내려준 명을 다하며 배울 걸 다 배워 다음 생으로 가는 게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놈 때문에 애를 태우며 육도 윤회를 더 하려고? 복을 지녀도 삶의 부조리함을 안고 생을 치러내는 것은 고독하고 힘든 일이다. 그런데 너의 복과 명을 버리고 어떤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냐?”

      “아저씨는 좋아 보여요..... 그가 제 무얼 훼손시킨다는 거예요?”

할머니께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시고 한숨을 크게 내 쉬었다.      

    “절대 안 된다. 그놈은 사주에 관이 많아. 정관과 편관이 모두 많으니 일이 되지도 않으면서 분주하기만 해...... 삶에서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것은 복 없는 분주함이야. 너는 몸이 실하지 않은데 그런 남편을 만나면 고단하고 힘들어서 명 재촉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할머니...... 또 시간이 가고 있다고 말하시려는 거예요? 왜 매 번 모든 일에 시간이 가고 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할머니는 말을 끊으셨다. 

     “잠시 마음이 동한 것이니 이 할미가 방편을 쓸 것이야...... 걱정하지 말고 애 끓이지 말고 네 방으로 건너가거라. 잠시 달빛을 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허파로 전을 지져 줄 테니 두꺼비 잰 연잎 주 한 모금이랑 먹거라. 몸이 너무 허해서 그래...... 골이 미어야 살지! 그리고 정 그 녀석을 놓지 못하겠거든 보름달이 중천에 또렷이 두 개가 뜨는 날 만나러 가거라. 그럼 모든 액운 없이 만나게 될 거야. 이 할미의 말을 명심해라. 중천에 두 달 뜨면 만나라는 얘기야......”

      할머니의 금고에는 돈과 금이 없었다. 거기엔 독을 제거한 말린 두꺼비와 지네, 연잎술과 소주가 그득히 들어차 있었다. 나의 외조모가 말린 두껍전을 부치시는 건 모든 화두의 끝이었다. 게다가 밤하늘에 두 개의 달이라니...... 할머니가 제정신인 걸까? 나는 절대로 아저씨와 이어질 수 없다.   


                   

                 *              *             *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내 외조모와 방울 할머니가 주검 곁에서 피살이 나무, 살살이 꽃, 혼 살이 꽃을 뿌려대며 지성을 드려서 나를 살리고 그놈과는 절대 안 돼...... 하시며 엄포를 놓으실 것 같았다.          

                      


                사랑의 세 가지 정의     



      할머니께서 내게 ‘이승엔 사랑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정말 이상한 일이다. 사랑이 없다니...... 모든 철학, 서사, 역사가 사랑 이야기로 그득한데...... 할머니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나는 사랑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문학을 선택했다. 세상에 모든 사랑 이야기는 다 읽어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틀렸음을, 세상엔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은하수를 메울 만큼 아름다운 어떤 사랑이 있음을 꼭 증명해 보고 싶었다. 할머니는 사랑이라는 것은 인과를 틀어버리는 우스꽝스러운 논리이고, 짝이 맞지 않는 허름한 몹쓸 짚신이며, 실인 즉 운이 좋으면 아주 짧은 순간만 환희심을 주는 인간에게는 길게 허락되지 않은 상놈의 영역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아저씨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단 한 마디의 말로 일침을 가하셨다.

   “흥..... 시주하네....”


              

  *황금 팬츠인과를 틀어 버린 사랑          

  

 로버트 쿠버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읽다가 퍼뜩 생각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인과를 틀어버리는 우스꽝스러운 논리를 본 것이다. 드디어 나는 최고의 웃기는 사랑의 서사를 발견한 것 같았다. 배가 아프도록 웃기고 또 웃겼다. 할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선비상을 마주 대고 할머니 무릎 곁에 앉아 이 이야기를 읽어드릴 텐데... 그러면 할머니는 상 위로 손바닥을 두드리시며 박장대소를 하실 것이다. 나와 할머니는 함께 웃을 것이다. 함께 말이다. 함께...... 같이......



     옛날 옛적에 꼭 끼는 황금 바지를 입은 아리따운 어린 공주가 있었단다. 그런데 그 바지는 너무 꼭 맞아서 아무도 그걸 벗길 수가 없었어. 그 소식을 듣고 멀고 먼 각지에서 기사들이 몰려와 큰 소리를 치고 득의양양 바지를 벗기려 기운을 몰아 쓰며 열망했지만 좀처럼 그 바지는 벗겨지지 않았단다. 한 성급한 어떤 기사가 황금빛 바지의 앞섶을 칼 날로 내리쳐서 억지로라도 벗기려 시도했지. 하지만 칼날은 산산조각 났고 그가 얻은 것이라곤 일생동안 안고 살아야 할 치욕과 불명예뿐이었단다. 드디어 국왕이 선포했어. “누구든지 내 딸의 바지를 벗기는 사람에게 그녀를 신부로 주겠다.”라고...... 그리고 덧붙여 “공주뿐만 아니라 그 강력한 힘과 불가사의로 알려진 요술 부지깽이가 부상으로 주어질 지어다.” 

   그 포고를 들은 한 기사가 동료에게 씁쓸하게 불평했어. “만약 내게 그 피 묻은 요술 부지깽이가 있다면 장담컨대 그 피 묻은 공주의 바지를 벗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텐데!” 그러나 바로 그때 그 경솔한 발언을 길가 덤불숲 속에서 알몸으로 몸을 웅크린 수염도 깍지 않은 늙은 난쟁이 괴물이 엿듣고 만 거야.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 괴물은 자기가 요술 부지깽이를 훔쳐서 미인을 얻어야겠다고 결정했지. 그런 결정은 가장 용감한 기사에게조차 불가능한 것인데 하물며 털이 텁수룩한 흉측한 알몸의 짐승 같은 불운아에게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하지만 사실인즉 진실은 이러했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그 난쟁이의 아버지는 한때 국왕의 공식 관리인이었던 거야. 그래서 아들인 그는 궁정의 불가사의 한 비밀의 방들 사이를 누비며 자랐던 거지. 그러니 상상해 봐. 바로 다음 날 관리인의 아들이 구부정한 털투성이의 알몸으로 왕 앞에 나타나서 툴툴거리며 과장된 몸짓으로 공주의 바지를 벗기고 상을 타겠노라고 말했을 때 궁중사람들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느냔 말이야! “정말이냐?” 국왕이 말했지. 왕의 박장대소가 온 궁 안에 울려 퍼지고 모든 기사들과 숙녀들까지 합세하여 뒤집어져라 웃어댔지. “내 딸을 이리로 당장 데려 오너라!” 왕은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즐거워서 큰 소리로 외쳤어. 공주도 웃긴 했지만 그 이상하게 생긴 작은 거인을 보자 겁이 났지. 그녀가 겁을 먹은 채로 앞으로 나서자 황금빛 바지에서 섬광이 비춰 온 궁 안이 다 환해졌어. 관리인의 아들은 재빨리 요술 부지깽이를 꺼내 그 끝을 공주에게 갖다 댔지. 그러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황금빛 바지가 궁전 바닥으로 쑥 벗겨졌어. “오!” “아!” 이 해괴한 광경에 궁전에 있던 귀족들은 놀라움과 찬탄을 금치 못해 탄성을 질러 댔지. 공주는 얼굴이 달아올라 벌벌 떨면서 자기도 모르게 요술 부지깽이를 부여잡고 안절부절못하다가 실수로 거기에 키스했어. 그러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백색과 진청색이 섞인 빛나는 갑옷을 입은 멋진 기사가 그녀 앞에 나타나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거야. 공주는 평소에 그런 파이프의 기사를 연인으로 상상했던 거지. 요술부지깽이는 마음의 소원까지 들어주거든. 멋진 기사는 주변을 둘러보고 칼을 뽑아 털 수북이 난쟁이를 베었지. 그리고는 벗겨진 바지를 딛고 서 있는 공주를 향해 활짝 미소를 짓고는 파이프에서 재를 털어냈어. 파이프의 기사는 “전하, 제가 괴물을 처치하고 공주님을 구해 냈습니다!”라고 말했지. 

   하지만 왕은 음울하게 대답했어. “천만에 너는 내 딸을 과부로 만들었어, 바보에게 키스를 하다니!”

   “아닙니다. 제발!” 파이프 담배를 피우던 기사가 간청했지.

   “입 닥쳐!”                    

    


사랑은 늘 예상을 빗나간다. 실제로 어린 공주의 황금 바지를 벗긴 것은 털이 숭숭 난 못생긴 난쟁이 괴물이고, 공주가 키스하고픈 멋진 사내는 마법 속에 살고 있는 환상의 기사였다. 그러니 나를 사로잡은 환상의 연인은 곧 사라질 운명이고 끔찍하게 싫고 추한 존재가 실은 운명의 주인이라는 것이 바로 삶의 진실 아니던가?  


                

                   *             *              *     

  


 할머니의 할머니는 중국책을 읽으시고, 시를 아시고, 음식을 나누는 취미로 인근 동네에 평판이 자자하신 분이었다. 나에게 외고조모가 되시는 그분은 수많은 오색전을 부치는 특기가 있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누루미라고 불렀는데 일 년에 서 너 번씩 큰 솥을 걸고 육전과 채전을 부쳐서 곡주와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 보시했다. 고조모님은 달랑 하나밖에 없는 딸 연화를 조치원 가난뱅이 최 치원에게 시집보냈다. 나도 외조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했다. 외조모님은 인간의 삶과 운명, 신의 문제에 대해 언제나 의문을 가졌고 일상의 작은 사건도 세세히 응시하여 거기서 진실을 알아내려 하셨다. 외조모인 성림과 무당 방울의 사유는 현재를 살아가는 내 삶 속에 번진 물감이다. 나는 갑덕 할머니의 손녀딸 옥현과 친구가 되었다. 옥현은 산신당의 선녀를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고 했고 나는 산신당의 선녀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었다. 우리는 그 바람을 이루려 살고 있다. 할머니는 내 사랑을 방해하시고 내가 삶에서 사랑할 사람을 정해 주셨다. 나는 할머니의 뜻을 따랐다. 할머니가 처방해 준 삶의 방식이 과연 내 인생에 좋은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            *           *


당신은 그리워서 손가락을 깨물었다고 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패러디하여 조심스럽게 써 내려간 내 편지에 답장을 포개어 가지고 다니던 당신의 낡은 가방이 떠오릅니다. 철없는 남동생이 잠시 다니러 온 당신의 가방에서 그 편지를 꺼내 들었고 서로 묵인하며 가슴 조이던 비밀이 들통날까 봐 둘 다 덜덜 떨며 어른들의 눈을 피해 저녁 식탁에서 힘들게 침을 넘겼던 그 밤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사랑했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던 거지요. 삶은 우리 앞을 지나가는 한 폭의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바라볼 수만 있는 화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이맥스 영화관에 앉아 입체 안경을 쓰고 있는 관객입니다. 마치 능동적으로 그 공간을 장악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의자에 묶여 착각 속에 자신을 내맡긴 것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두 가지이겠죠. 눈을 크게 뜨고 장면 장면을 직시하며 감정을 이입하거나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아저씨는 나를 사랑했고 나도 아저씨를 사랑했지만 우리의 연분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들의 방편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방해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뒤에 우리의 삶이라는 영화 속에 서로 이어지는 그런 소재가 없었기 때문이겠죠......

        열다섯 마리의 고양이 꼬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부적이 그려진 노란 봉투에 그 꼬리들을 넣어 베개 안쪽에 깊숙이 꿰매놓으면 되는 거다. 그걸 베고 자는 여자 아이는 애욕이 잦아들어 환에 걸려들지 않는데 그 보다 더 신통한 것은 부적에 쓰여 있는 대상을 죽도록 미워하게 되는 원진살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고양이 꼬리는 사향처럼 작용하여 남자의 정기를 유혹하는데 이상하게도 부적에 방편을 쓴 남정네는 그 작용에서 제외된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 방식을 쓰기로 결정하셨다. 경동시장에 가면 고양이 꼬리쯤은 백 개도 더 구할 수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빨간 튤립이 그려진 오리털 베개를 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을 때 나는 그저 계절이 바뀌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던 짙은 여름이 물러나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초가을의 입김이 창 언저리에 머물기 시작하던 때였다.      



어느 나라에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다. 그런데 공주는 계모 여왕의 모함을 받아 궁에서 쫓겨났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여왕의 악한 속셈을 알아챈 왕은 자신의 딸을 찾는 방을 나라 전체에 흩뿌렸다. 수많은 여인들이 자신이 공주라 자처하고 나섰기에 왕은 자신의 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 공주를 가려내기 위해 왕은 한 알의 완두콩을 요 아래 숨기기로 결정한다. 공주라면 겹겹의 요 아래 묻힌 완두콩의 딱딱함을 느끼고 불편함을 호소할 테니까..... 공주라면 말이다. 열 장도 넘는 색색가지의 이불들 맨 아래 초록 색 완두콩이 날이 선 듯 놓여 있다. 형형색색의 이불, 맨 위에 누워보는 수많은 여인들......            

 그림책 한쪽 면을 가득 메운 나풀거리는 헝겊들. 겹겹이 쌓인 그 이불들 맨 아래날이 선 듯 당당하게 서있는 초록 완두콩, 분명 그 동화책에서 임금은 자신의 딸을 찾게 된다. 한 거위 치는 여인이 불편함을 호소하여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주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주신 포근한 오리털 베개를 베고 날이 선 부적의 기운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 해 겨울을 잘도 났던 것이다.      


      

  *그리소스토모와 마르셀라짝이 맞지 않는 허름한 짚 신     


어느 날 돈키호테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무덤 위 묵직한 돌조각 곁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여기 사랑에 빠졌던

               차디차게 식어버린 한 젊은이가 누워있네.

               그는 양치는 목동이었으나, 실연으로 눈을 감고  말았도다.

               아름다우나 배은망덕하고 냉담한 여인의

               매정한 손에 숨을 거두었도다.

               사랑의 폭군이 그와 더불어

               자신의 제국을 더욱 넓히도다.     



목동 그리소스토모는 산양 치기 처녀 마르셀라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마르셀라는 그리소스토모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아무리 구애를 해도 터럭만큼의 마음도 주지 않는 마르셀라 때문에 그리소스토모는 목숨을 끊는다. 사랑의 슬픔에 져버린 젊은이에게 수많은 동정이 쏟아지고 그를 죽게 만든 마르셀라에게는 산속에 사는 잔인한 바실리스코의 괴물이라는 악담이 난무한다. 돈키호테 일행이 이 이야기를 들으며 한탄하고 있을 때 마르셀라가 나타나 자신의 사랑을 변명한다.     


   살모사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맹독을 가졌다는 그 천성으로 인해 비난받을 수 없는 것처럼 저 역시 아름다음을 타고났으니 아름답다는 이유로 지탄받을 수 없지요. 정숙한 여인에게 아름다움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 불꽃, 혹은 예리한 칼날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면 데이지도 베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명예와 정절은 영혼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주는 것이니, 이런 것이 없는 육체는 비록 아름답더라도 아름답게 보일 수 없는 것입니다. 정절이라는 것이 육체와 영혼을 더욱더 아름답게 가꾸어 주는 미덕이라고 하면서 왜 아름다움으로 사랑받는 여인에게 그저 재미로 강압적으로 달려드는 남자의 의도에 의해 정절을 잃으라고 하십니까? 저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또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초원에서의 고독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 산속의 나무들이 제 친구이며, 투명한 시냇물이 제 거울입니다. 저는 이 나무들에게 제 생각을 이야기하고 시냇물에게 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요. 저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불꽃이며, 멀리  눕혀진 칼입니다. 제 외모를 보고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 말로써 정신을 차리게 해왔지요. 그리고 욕망이 희망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이라면, 저는 그리소스토모에게 아무런 희망도 준 적이 없고, 그건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제 잔혹함이 그를 죽였다고 말하기 앞 서 그의 집착이 그를 죽였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의 생각이 진실했기에 제가 그에게 화답해야 했다고 책임을 지우려 하시니, 지금 그의 묘 자리를 파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그가 제게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저는 그에게 영원히 혼자 살고 싶다는 점과 오로지 대지만이 제 은둔의 열매를 얻을 것이며, 아름다움의 전리품을 가질 거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제가 이렇게 솔직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허황되게 집착하고 바람에 맞서 항해하고자 했다면, 그가 자제심을 잃고 광기의 바다 한가운데 빠져버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제가 그의 마음을 유혹했다고 생각하신다면 잘못 아시는 겁니다. 그의 기대에 부흥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저의 선의를 잘못 해석하신 겁니다. 그는 아니라는 것을 다 알았음에도 집착하며 걷잡을 수 없이 좌절의 나락으로 빠졌지요. 그 사람의 잘못으로 그렇게 된 일인데 저에게 죄를 묻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속았다고 불평하시고 아무런 희망의 약속도 없었다고 좌절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유혹했다고 믿어도 좋고, 제가 받아들여 죽었다고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런 약속도 안 했고, 속이지도 않았으며, 유혹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은 사람이니 부디 잔인하다거나 살인자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지금껏 하나님은 저의 운명적 사랑을 원치 않으셨으며, 제가 누군가를 선택해 사랑하는 것도 금하셨지요. 이렇게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은 제게 사랑을 고백하시는 모든 분들이 들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니, 앞으로 저 때문에 죽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질투심이나 불행으로 인해 죽는 것이 아니란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질투심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런 거절을 경멸로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저를 야수나 바실리스코라 부르는 분은 저를 해롭고 악한 존재처럼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저를 배은망덕하다 부르는 분들은 제게 은혜를 베풀지 마시고, 저를 은혜도 모른다 하시는 분은 저를 알려고 하지 마세요. 저를 잔인하다고 하시는 분은 저를 따라오지 마세요. 이 야수 같고, 바실리스코 같고, 배은망덕하고 잔혹하며 은혜조차 모르는 저는, 여러분을 어떤 식으로든 찾지도 않을 것이며, 은혜를 베풀지도 잘 지내려 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한 여러분을 따르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소스토모가 인내심이 부족하고 욕망이 지나쳐 죽었을 진대, 왜 저의 정직하고 신중한 행동에 죄를 씌우려는 건가요? 제가 나무를 상대로 순결을 지키고 있는데, 왜 남자를 상대로 그 순결을 잃으라는 것입니까? 이 마을의 양치기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산양을 돌보는 것이 제 기쁨이지요. 결국 이 산이야말로 제 갈망의 대상이며, 만일 제가 이곳에서 발걸음을 내디뎌 제 영혼의 본향을 찾아가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천국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함일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만히 누워 창문과 방문을 모두 꽉 닫고 피아졸라 리베르탱고를 틀어 놓았다. 그리스토모는 마르셀라의 사랑을 얻기 위해 모든 재산을 버리고 산양 치는 목동이 되었다. 그러나 마르셀라가 그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기에 결국 모멸감과 슬픔에 목숨을 끊고 만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깔아준 요에 누워 나는 왜 마르셀라가 생각난 것일까. 마법의 고양이 꼬리가 사주를 한 것일까? 나는 마르셀라가 되어 아저씨를 죽이고 싶어졌다. 연구실에 갈 때까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은 그의 성급함과, 돈을 던져 할머니에게 미운털이 박힌 그의 옹졸함의 대가로, 목을 매듯 사랑을 구걸하는 그를 절대 받아주지 않고 서서히 말려 죽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짝이 맞지 않는 허름한 짚신짝이다. 아니 사실 나는 그리소스토모이다. 이제는 죽어버린 한 떨기 수선화 같은 그리소스토모이다.      

                             

                    

       *조롱선비는 왜 기녀를 떠났을까      

  


 어쨌건 나는 아저씨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고양이 꼬리의 저주 때문인지, 그를 그리소스토모처럼 말려 죽여야겠다는 내 비감 때문인지 여하튼 그에게 정이 떨어졌다. 어머니가 놓아주신 페르시아 양탄자 같은 색색의 부적은 나를 형상의 감각적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시키는 마법의 칼이었다. 그렇게 들뜨던 나의 감정은 보름달이 서서히 이지러지듯 메말라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법주사 주지 스님이 여름마다 독경하는 반야심경 강론을 들으시겠다며 대학 3학년 여름 방학에 나를 속리산으로 데려가셨다. 우리의 생각이 분별에 의해서 작동되는 것이니 분별만 없애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셨다. 분별을 없애는 것이 나에겐 첩첩이 쌓인 산 중 나무들을 없애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법주사 둘레에 어떻게 저렇게 짙고 짙은 초록 산들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는지 그것만 신기했다. 매미 소리는 하늘을 찢어 놓을 듯 거칠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나무와 매미 때문에 정신이 돌 지경이었다. 나는 댓돌 마루에 멍청히 앉아 앞산을 손으로 치워보았다.... 그러면 뭐가 있을까? 또 산이 나온다. 그것도 치운다. 그것도 치운다. 그것도 치운다. 친할머니, 친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미국으로 그림 공부를 하러 간 옥현이 그리웠다. 멍하니 마루 끝에 앉아 있는 내게 할머니께서 다가오셨다.

   “이렇게 공기 좋은 곳에서 정갈한 음식을 먹고 쉬는데 어찌 얼굴이 누렇게 떴을꼬? 아직도 그놈 생각에 빠진 것이냐?”

    “아니에요. 할머니... 그냥 마음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해요.”

할머니께서 내 손을 잡으시며 은은하게 미소 지으셨다. 할미가 재미난 얘기를 하나 들려줄 테니 잘 듣고 답해 볼 터이냐?     

중국의 한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지. 그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내 집 정원 창문 아래 의자를 놓고 거기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지. 그러나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는구나.        

 “왜 그 선비는 기녀를 떠났겠느냐?”할머니께서 물으셨다.

 “사랑하는데 떠났다는 건가요?”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받아 준다고 했는데 정말 떠났어요?”

 “그람, 그람.”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나를 바라보시며 할머니는 법주사 하늘이 떠나가도록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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