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낭만에 대하여

내 삶이 아닌 것은 다 낭만이다

by 월급쟁이 노마드
"와 그럼 막 점심시간에 공원에서 샌드위치 먹는 직장인이 되는거에요? 낭만 그 자체인데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한테 누가 이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직장 동료 거나 친한 후배였겠지. 누가 말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건 물론, 왜 이 문장이 내 머릿속에 깊게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살다 보면 별로 중요한 말이 아닌데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는 문장이 있다. 아마 이 것도 그런 문장 중에 하나겠지.


우리는 낭만을 글이 아니라 이미지로 그려낸다. 그 사람의 낭만 속 유럽 점심식사는 아름다운 공원, 푸른 잔디밭 또는 벤치에 앉아서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거나 혼자 앉아 먼치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샌드위치를 먹는 그 장면이겠지. 낭만적이다. 햇살이 비치고, 잔디는 푸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의 점심이라니.


몇 주가 정신없이 흘러갔고, 낭만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가을이 찾아왔다. 비가 며칠 동안 연이어 내리고, 흐릿흐릿한 유럽의 가을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날이 흐린 게 다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직장인들은 사무실에 있는데 날씨가 너무 화창하면 마음이 더 어지럽지 않은가.


그러던 어느 날, 2주 내내 흐리다가 오랜만에 해가 났다. 마침 회의도, 점심 약속도 없어서 산책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에 혼자 산책하며 광합성도 하고, 머리도 비우고, 주말에 뭐 할지 생각해야지, 그리고 시간이 애매하니 점심으론 샌드위치를 먹어야지라고 생각하다가 그의 말이 생각났다. 아 맞다! 낭만!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그 낭만!


그래 나도 낭만 한번 즐겨보자. 샌드위치를 사려면 한참을 둘러가야 해서 일단 바로 공원으로 갔다. 햇살이 정말 눈부셨고, 맞은편 몽블랑은 이름처럼 하얗게 빛났고, 공원엔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관광객, 혼밥 하는 직장인, 시간을 쪼개어 점심시간 운동을 하는 러너들. 나도 잠깐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어본다. 그리고 그들을 관찰해 본다.


참 낭만적으로 보인다. 근데 문득 생각이 났다. 내가 샌드위치를 여기서 먹는다고 나도 이 상황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을까? 아침에 짜증 나는 일들과 오후의 해야 할 일 사이에 잠깐 짬이 나서 해를 쬐러 온 내가, 그저 공원에서 점심을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이 상황을 낭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낭만은 결국 내가 바라보는 이미지 속에만 있는 게 아닐까. 직장인이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이미지 속에는 그가 가진 고민, 일에 대한 고충, 밥벌이의 고단함이 나타나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결국 낭만은 그런 게 아닐까. 연속적으로 시간이 흐르는 내 삶에서는 찾기가 힘든 것, 하지만 내가 남의 인생의 짧은 한 순간을 볼 때, 나는 그 장면 앞뒤에 있을 삶에 대한 고민을 알 수 없기에 거기서 낭만을 느끼는 것이다. 오로지 이미지 속에는 아름다운 것들만 남아 있으니 말이다. 햇볕, 잔디밭, 정오, 바람, 공원.


그리고 내가 낭만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실현하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더 이상 아름다운 이미지가 아니라 흘러가는 내 삶의 일부가 되는 순간 더 이상 낭만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언제든 먹을 수 있게 된 지금, 나에겐 더 이상 그게 낭만이 아니게 되었다. 이걸 낭만을 잃었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실현했다고 해야 하는 걸까?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아주 나중에 누가 말했는지 기억나면 꼭 고맙다고 전해줘야겠다.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낭만은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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