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높아지면서 바깥 활동이 잦아진다. 대문은 활짝 열어 놓고 마당에 내려섰다. 잔디는 파란색으로 밀려오고 메마른 나뭇가지에도 새싹이 돋는다. 지난겨울에 씨 뿌린 채소도 하나둘 고개를 내밀고 세상으로 나왔다. 갖가지 나무의 꽃잎은 순서에 맞추어 매화꽃이 피는가 싶더니 복숭아꽃과 자두꽃이 분홍색을 드러내고, 하얀 배꽃이 덩달아 소식을 전한다.
본채 처마에 주렁주렁 매달린 전선은 실타래처럼 뒤엉키고 찔끔찔끔 까만 테이프에 감겨 너덜너덜하다 못해 불안하다. 닭장 옆 창고로 이어지는 자락 감나무에 앉은 참새들에 눈길이 머문다. 천장에 매달린 지그재그 전선 행렬은 슬며시 사다리를 펼치게 만든다.
전원생활 4년째 집안 여기저기에 손길이 필요하다. 굼뜨고 익숙하지 않은 몸짓 탓에 속도가 문제다. 차단기 선로 확장에 이어 이번에는 전선 교체를 시도한다. 얇고 오래된 것은 예방 차원에서 처리된다. 2.5mm 동선 한 꾸러미가 마당에 던져졌다. 개폐기에 연결된 선부터 뽑아낸다. 본체 처마 밑으로 이어진 배선을 걷어내고 새 전선을 펼치는데 천장에 고정 나사를 제거하는 일부터 고개가 머문다.
전등과 스위치 그리고 콘센트까지 연결하는 일이 쉽지 않다. 전선 피복을 벗기는 일부터 '도구가 일한다'는데 용도에 맞는 것이 없으니 칼과 펜치가 대신한다. 위험이 따르는 전기 배선 작업이다. 전선 연결을 하다가 오류가 생기면 건물을 통째로 홀라당 태우거나, 높은 사다리에서 떨어질 수 있는 불상사가 염려되기도 한다. 노출되는 선은 벽 곡각 면을 따라 고정시킨다. 화장실과 세탁기까지 원 선 배열이 끝나고 곳곳의 연결 부위에 테이프를 감는 작업이 녹록지 않다. 손가락에 힘을 과도하게 준다. 꾀를 내어 외피는 길게 벗기고 연결 후에는 모조리 덮이도록 칭칭 감는다.
조명등은 LED 레일 조명으로 멋을 내 본다. 투박한 원형 조명 갓이 묵직하다. 화장실 입구에 스위치를 따로 뽑는다. 이전에는 안쪽에 직접 연결되어 어둑한 밤에 불편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남은 배선을 정리하고 마음 졸이며 차단기 스위치에 힘을 준다. 스위치 연결과 동시에 불이 켜진다. 각각의 연결 장치마다 점등 여부를 확인하는데 이상이 없다. 마지막으로 새로 산 LED 등을 켰다가 끄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스위치를 내렸는데도 잔광 현상이 있다. 무언가 오류가 있다는 증표다. 초보자에게 또 다른 숙제가 생겼다. 문제 해결은 뒤로 미룬다. 여차하다가 ‘선무당이 사람 잡는 일'은 생기지 않아야지.
전기는 정보와 더불어 우리의 세상을 지탱하는 심장과 같다고 할까. 이제는 전기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어렵다. 단 몇 분 동안의 정전이라도 생기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다. 단전된 지역은 세상이 멈추다시피 한다. 어느 것 하나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 있을까.
초등학교 시절 내가 살던 면 단위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읍 지역과는 달랐다. 모든 일이 자연에 의지해 이루어졌다. 밤에는 등불이 어둠을 밝혀 주거나 간혹 촛불이 대신하였다. 이조차도 아껴야 한다며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부모님의 강요가 뒤따랐다. 식은 밥은 바람이 통하는 시렁에 올려지고 반찬은 우물에 줄을 매달아 내려졌다. 부채가 바람을 대신 일으키고 난방은 화로와 아궁이 장작불로 데우는 온돌이 전부였다. 자연에 의지하고 사람들의 지혜가 모일수록 노력을 줄일 수 있었다.
전력은 편리함에 이어 이제는 단 한순간이라도 끊겨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된 지 오래다. 하늘과 땅속에 거미줄처럼 이어진 선로는 하나가 되어 있다. 물질적인 부분은 모자라는 것이 없는 시대다.
지금은 세계가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한 나라에서 생긴 일이 대륙을 건너 반대쪽까지 영향을 끼치지 않은 지역이 있을까. 사소한 것부터 큰일까지 미치지 않는 것이 없는 듯하다.
정보의 고속도로는 통제와 숨김이 미치지 못한다. 나라 안의 소식은 물론이거니와 지구촌의 이야기가 낱낱이 전파된다. 집 안 곳곳의 정비에 이어 우리 주변 세상을 샅샅이 막힌 배관이 뚫리듯, 한 다리 건너 이웃이 되는 사회 관계망들은 모두가 하나가 된 듯 알지 못하는 사람과 친구 추천 목록으로 다가온다. 나와 직접 관계가 없지만 다른 사람의 소식을 괜히 들여다본다. 일부러 나에게 노출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옛집의 오래된 전선이 이리저리 엮여 쑥대머리를 연상시켰다. 새로운 배선 정돈으로 집의 인물이 달라지듯, 널브러지고 오래된 관계망은 정리하는 것도 내가 할 일이다. 일 년에 한 번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는 번호는 무의미하다. 저장 공간만 채우는 일은 제거해야지. 스마트폰은 덮어 두고 세상과 떨어져 정보의 쓰레기를 몰아내는 날을 기다린다. 얼기설기 연결된 세상을 마주하고 극기복례를 되새긴다. 새삼 공자의 인, 사랑을 불러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