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1월인데 센터는 이미 크리스마스다.
트리를 꺼내고 초콜릿과 쿠키, 젤리, 사탕으로 간식 봉지를 만들었다.
센터 입구에 간식 봉지와 드립백을 놓아서 내담자들이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
매년 11월부터 시작해 12월까지 진행되는 작은 이벤트다.
잔뜩 쌓여있는 과자 봉지는 보기만 해도 즐겁다.
내 어린 시절에는 종합과자선물세트가 있었는데 딱 한 번 받았던 기억이 있다.
사실 특별한 과자는 없었지만 여러 과자를 듬뿍 받는 것은 놀이동산에 간 것처럼 기뻤다.
마음햇볕 심리상담치유센터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작은 기쁨을 느끼기를 바라며 과자 봉지를 만든다.
마치 산타클로스가 된 것처럼 마음이 넉넉해진다.
대기실 내담자 테이블도 초록과 빨강 체크무늬 테이블 커버를 씌웠다.
내담자들이 마음햇볕에 오면 산타 마을에 온 것처럼 푸근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겨울이 와도 내담자들 몸과 마음이 따뜻하기를.
이런 마음이 가득하면 나도 행복해진다.
상담을 하는 중에 내담자들은 종종 운다.
몇몇은 상담자인 내게 언제까지 울게 될지 물어본다.
물론 나는 모른다.
어쩌면 내담자도 내가 알 거라 생각해서 물어본 것은 아닌 것 같다.
상담에서 내담자가 보이는 눈물은 혼자 흘리는 눈물과 다르다.
위니컷은 이렇게 말했다.
“환자가 갈망하는 울부짖음은 희망을 버리기 전 최후의 울부짖음이다. 그 울부짖음은 목적한 바를 달성하는데 실패한 쓸모없는 울부짖음이기 때문이다.”
위니컷은 의사였기 때문에 그가 만난 사람을 환자라고 지칭했다.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 못한 울부짖음이란 중요하고 친밀한 대상이 내 고통에 반응하지 않았을 때를 의미한다.
친밀한 사람이 내 울부짖음을 통해 나의 고통을 눈치채고 보듬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반응을 받지 못하면 울부짖음은 희망을 기대했으나 실패한, 고통의 소리침이 된다.
인간은 상대와 연결되기 위해 신호를 보내고 이러한 사회적 연결체계는 생존에 필수다.
반응을 받지 못할 때 버려짐, 소외, 외로움, 고립을 느낀다.
사회적인 죽음이며 존재의 죽음을 의미한다.
여러 상황에서 벌어지는 “따돌림”이 치명적인 이유다.
사회적 연결체계를 통해 안정감을 경험할 때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
내담자가 상담에서 보이는 눈물은, 울부짖음은 어떤 의미인가?
상담에서 라포가 형성되고 내담자가 안정감을 느낀 뒤 흘리는 눈물은 희망을 의미한다.
우선 자신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 스스로에게 해주는 반응이며 상담자의 공감도 반응이 된다.
비난과 평가 없이 고통이 수용될 때 소외감은 사라진다.
사회적 연결감은 바로 이해와 수용인 것이다.
고통은 숨겨야 하는 결점이 아니다.
고통은 풀어버려야 하는 지점, 평온으로 가는 터닝 포인트다.
그런데 고통을 반사 작용처럼 무조건 거부할 때 아이러니하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염증 난 상처 같은 고통은 따뜻한 햇볕이 필요하다.
원하지 않은 커밍 아웃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함께 하는 것이다.
내담자의 울음은 안도와 반가움, 희망의 표현이다.
그러니 상담에서 눈물이 나오면, 울음이 올라오면 허용한다.
나오지 않을 때까지 허용하면 된다.
절망과 실패로 울음을 경험한 사람은 울음 자체를 두려워한다.
부정적 감정은 자신의 실패와 고통을 상징한다고 여긴다.
울음은 타인과 관계 속에서 다른 의미가 된다.
상담사로 지내면서 나는 얼마나 연결감을 느꼈나?
돌아보면 단절감이 더 크다.
직장에서 동료를 만나지만 진실함은 적고 외로움은 컸다.
오랫동안 연결감을 느끼지 못해서 울지도 못했던 것 같다.
반응 없는 울음의 고통을 잘 알기에 버텼음을 이제야 알겠다.
많은 내담자를 만나 그들의 울음과 함께하면서 정작 내 고통에는 거리를 뒀다.
등잔 밑처럼 어두웠다.
상담센터를 열고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나와 가까워진 점이다.
무슨 엉뚱한 말인가 싶지만 나는 나 자신과 멀었다.
상담센터를 운영하면서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깨달았다.
월급 상담사로 있을 때나 상담센터를 운영할 때나 혼자 있는 느낌은 같지만 다르기도 하다.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데 연결감을 느끼지 못하는 외로움은 더 고통스럽다.
오히려 혼자가 되니 현실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현실은 생각보다 외롭지 않았고 자유로웠다.
바로 옆에 동료는 없었지만 자신의 길을 걷는 상담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각자의 지향을 향해 길을 간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동료였고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었다.
내 울음을 이해하는 동료를 만나는 것은 희망이고 기쁨이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지는 않지만 있다는 사실로 충분하다.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얼마 뒤 우연한 계기로 박사 과정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동료를 만났다.
상담센터가 다행히도 잘 운영되어서 상담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 대기가 종종 있다.
바빠서 박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박사 공부를 시작한 것은 우연이면서 필연처럼 느껴진다.
내가 상담 박사 공부를 시작한 것은 꿈 때문이었다.
2년 전 겨울 어느 날 꿈을 꿨다.
꿈에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데 강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만이 아닌 다른 보조 강사도 있어서 맡기고 강의실을 나왔더니 밖에 큰스님이 계셨다.
시댁에 비구니 스님 두 분이 계시는데 세속으로 말하자면 남편의 이모들이다.
큰스님이 특이한 경전을 내게 주시면서
“어려우니까 잘해.”
라고 하셨다.
나는 “네.”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부담을 많이 느꼈다.
어려워 보였기 때문에 잘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꼭 하고 싶기도 했다.
꿈속에서 큰스님이 주신 것을 명확하게 경전이라 인식했는데 꿈을 깨고 나니 그게 경전인가 싶었다.
일반적인 책 모양이 아니고 얇은 나무판 같은 재질의 직사각형 판에 황금색 글씨가 적혀 있었는데 한자 같기도 하지만 알 수 없는 글자였다.
이런 직사각형 낱장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고 여러 장이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경전은커녕 책 같지도 않았는데 나는 꿈에 경전이라고 분명히 인식했다.
꿈을 깨고 나서도 경전이 너무 선명해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패엽경”이란 불교 초기 경전이었다.
너무 신기했다.
패엽경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때 알았는데 알지도 못한 꿈을 꾼 것이다.
문득 기독상담은 있는데 불교상담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검색을 해보니 있었다.
불교상담이 뭔가 싶어서 알아봤는데 깜짝 놀랐다.
정신역동과 불교철학을 연결해 공부하는 분야였다.
내가 정신역동과 대상관계를 상담의 주 이론으로 하고 있기에 불교상담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불교철학이 정신역동과 어떤 접점을 갖고 있는지, 접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센터 운영으로 바빴지만 자꾸만 불교상담에 끌렸다.
결국 꿈을 꾸고 두 달 만에 박사 입학을 했다.
올 겨울을 끝으로 공식 박사 과정은 마무리가 된다.
2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아쉽다.
다행히 내년 논문 학기가 있어서 안심이 된다.
논문 학기에는 뇌과학을 비롯한 흥미로운 공부를 할 것이다.
상담센터를 열고 안정적으로 운영하기까지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것처럼 이뤄온 것이 꿈만 같다.
실제 꿈을 꾸고 박사 과정에 들어가고 마무리까지 할 줄은 몰랐다.
저녁 상담을 앞두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모든 것이 행복하다.
때로 몸이 피곤해서 집중이 떨어지기도 하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힘든 날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을 가고 있고 유명한 분야는 아니지만 신념을 갖고 자신의 길을 가는 동료가 있어서 기쁘다.
박사 과정에서 도반을 많이 만나지는 못했지만 한 두 명이 큰 힘이 되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있었고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 안심이 된다.
마음햇볕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좋기만 한 행복이 아니라 힘들고 실망도 있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고통이 있어도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현실의 행복을 누리기를.
따뜻한 마음, 가을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