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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햇볕 Nov 15. 2024

깡통이 되어가는 과정




비가 내릴 때마다 겨울은 가까워진다. 

한 해 힘듦과 벅참, 아쉬움을 비우는 늦가을 비가 온다. 

기온이 더 내려가면 비는 눈옷으로 갈아입을 것이다. 

어린 시절 학교 수업 시간에 좋아하는 계절을 물었을 때 나는 서슴없이 가을이라고 답했다.

내 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할머니도 가을 좋아하는데.”

나는 순간 잘못을 한 것 같았다. 

아이들 대부분은 여름이 좋다고 했다. 

나는 국민학교 출신이어서 당시 여름방학이 진짜 방학이었다. 

요즘은 여름방학이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겨울방학이 진짜 방학 같다. 

내 어린 시절 아이들은 여름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왜 하는지도 모르는 곤충채집과 그림 그리기 과제, 그림일기와 탐구생활 등을 했다. 

문제 푸는 공부를 하지 않는 것,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긴 휴가를 받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 대부분은 여름을 좋아했다. 

나는 활동적이지 않아서 여름은 그냥 더운 계절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만 다른 것 같아서 울적했다. 

짝꿍의 할머니와 닮기 싫었고 다르다는 것이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나는 그 후 사춘기가 오기 전 고1까지 대외적으로는 여름이 좋은 것으로 했다.   



        




어린 시절, 제법 큰 한옥에서 살았는데 안마당과 바깥마당이 있었다. 

전통적인 미음 자 구조로 넓은 마루가 있었다.  

마루에 앉으면 안마당과 네모난 하늘이 보였다. 

안마당 가운데 동그란 화단에는 이름 모를 작은 나무나 꽃이 있었다. 

가을이 되면 마루 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물감으로 색칠한 듯한 붉고 노란 잎들을 바라봤다. 

가을이 깊어지면 잎들 색은 진해지다가 색을 잃어버리고 마르면 잎은 떨어졌다. 

모든 잎이 떨어지면 화단은 앙상한 가지만 남고 나는 오히려 옷을 껴입는다. 

유년 시절 나는 한옥 마루 끝에 앉아서 변하는 나무와 하늘을 보는 것이 좋았다. 

가을은 온갖 색들이 카멜레온처럼 변하다가 증발해 버린다. 

그 시간들은 마법 같았는데 온전히 내 세계였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나를 본다면 어린아이가 청승맞게 멍하니 있다고 했을 것 같다. 

어린이는 활발하고 명랑하게 새싹처럼 방방 뛰어다녀야 한다고 많이 생각하니까. 

어린 나이에도 나는 두 명의 언니와 다르고 또래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렵고 외로웠다. 

생각이 많고 관찰하는 것과 책 읽기를 좋아했다. 

왜라는 질문이 많았지만 할 수 없었다. 

내가 질문을 하면 돌아오는 답변은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그게 왜 궁금해?”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궁금하면 안 되는 것을 궁금해하는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는 기분이었다. 

오로지 마루 끝에 앉아서 작은 정원을 보고 바람을 느낄 때 편안했다. 

하늘과 나무와 바람에게 질문하고 답을 들었다. 

자문자답이었지만 그 순간은 그들이 내 목소리를 빌어서 대답해 주는 것 같았다. 

나이가 들고 주변 사람들과 다름이 커졌지만 더 이상 한옥에 살지 않아서 나만의 마루와 정원은 없었다. 

대학생이 되니 음주가무를 접할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나는 음주가무가 불편해서 싫었다. 

왜 술을 먹어야 하나?

이런 질문을 동기와 선배에게 할 수 없었다. 

술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어울려 다니는 것은 “당연히” 좋은 것이어야 했다. 

문예창작학과여서 그런지 술을 먹고 방탕한 생활은 창작 에너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울리는 것이 별로고 술을 먹는 것도 별로고 노래는 더욱 별로였다. 

정돈된 환경을 좋아하고 시간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창작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불편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대학 입학 후 첫 선후배 첫 모임에서 기름이 가득한 닭볶음탕인지 감자탕인지를 먹고 노래방을 갔다. 

선배들이 노래를 부르고 후배들도 노래를 불렀다. 

나도 후배였음으로 내 차례가 올 것이다. 

당시 가요를 자발적으로 들은 적이 없어서 아는 노래가 없었다. 

간혹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기는 했지만 부를 수 있는 곡은 없어서 당황했다. 

아는 노래가 없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구석에 몰린 기분으로 뭐든 불러야 끝날 것 같았다. 

그때 떠오른 노래가 “파란 마음 하얀 마음” 동요였다. 

동요를 불렀고 노래방은 점점 숙연해졌다. 

더 이상 흥이 나지 않았고 그야말로 분위기는 심폐소생이 불가능했다. 

그 후 몇몇 선배가 나를 보면 “파란 마음이다.”라고 불렀다. 

누구나 노래를 다 좋아하고 불러야 하나? 

월드컵은 누구든 흥분되고 즐기나?

나는 붉은 악마가 싫고 붉은 티를 여러 명이 입고 다니는 것도 싫었다.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좋아한다고 같은 옷을 입을 필요가 있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도 내 안의 질문은 계속 생겨났다. 

임신을 하면 다 기쁜가?

출산해서 아이를 만나면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한가?

나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다른 감정과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견뎌왔지만 내가 엄마가 되고 나니 불안이 커졌다. 

임신이 불편하고 내가 낳은 아이를 보고 눈물이 나지 않아서 나 자신이 엄마로 부적절할까 두려웠다. 

모성이 없을까 봐, 또는 너무 적을까 봐 두려웠다. 

누군가 이런 나를 눈치챌까 더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행복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좋은 엄마고 아내이고 딸이지만 나는 힘들고 외로웠다. 

아이들에게 엄격하고 남편에게는 상사처럼 굴었다. 

아무도 모르는, 관객 없는 연극을 계속하는 것 같았다.           




우연처럼 상담사가 되고 상담 공부를 할 때 제일 먼저 만난 것은 내 고통이었다. 

단단한 고체 같은 고통을 통과해야 상담을 할 수 있다. 

자신의 고통을 에둘러서는 상담이 되지 않았다. 

상담은 자신을 아는 만큼 할 수 있다. 

수행처럼 자신을 탐색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길처럼 느껴졌다. 

외롭고 힘든 길이었다. 

고통의 길을 걸으며 만나는 내담자들은 고통의 동반자였다.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부단한 노력을 하는 내담자를 만나면 놀랍고 존경스럽다. 

안정, 행복, 평화를 위한 몸부림은 아름답다. 

나는 내 길을 걸으며 알게 된 것을 내담자들에게 전달한다. 

상담을 알려줬던 교수들과 든든하고 따뜻한 의지처가 되어준 수퍼바이저와 상담사, 동료에게 받은 지혜와 안정감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깡통이 되었다. 

단단했던 밀도가 낮아지며 내 마음은 비워졌다. 

마음이 덜 소란스러워지자 외부 소리가 잘 들렸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내담자 이야기가 내 내부에서 진동해서 커졌다. 

내담자 말이 잘 들리자 내담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느껴졌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이 있는 그대로 보였다. 

나는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알게 되고 선택하게 되었다. 

15년 동안 상담사로 산 것은 깡통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텅텅 비어서 고요하고 누구에게나 자리가 나고 배경이 될 수 있게 된다. 

빈 덕분에 안정감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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