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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햇볕 Nov 22. 2024

거스르는 자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이 문구를 떠올리면 마음이 고무된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많은 부분에서 다른 것은 틀린 것이었다. 

곰곰이 기억을 짚어보면 다르니까 틀렸어라고 드러내기도 하지만 애초에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전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식에서 ‘틀리지 않을 수도 있나?’는 생각을 품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다른 것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불안이 올라와서 “틀렸다.”라고 강하게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다르면 안 된다는 강한 압박 때문에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힘들다. 

이런 까닭으로 다른 생각은 현실과 다른 좋은 문장으로만 남아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타인을,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같은 것은 없다. 

쌍둥이도 서로 다르다.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같은 것은 없다. 

애초에 같은 것은 없는데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다르면 안 되고 틀린 것이라고 우긴 것일까?     

과거 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 자신이 이상하고 불편하고 부적절한 사람 같아서 움츠려 들었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 느낌은 내가 원래 잘못된 존재라서 답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잘못된 존재라는 것을 확인했나?

확인하면 혹시라도 잘못된 존재일까 두려워서 확인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려가면서 두려움은 사실처럼 되었다. 

두려움이 사실이 된 것도 잊은 채로 답이 없다는 두려움이 더해지고 해결되지 못할 것이란 좌절이 덮쳐서 그야말로 망했다는 결론에 도착하게 되었다. 

두려움과 고통에서 도망치기 급급해서 나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열심히 사는데 현실에서 묘하게 박자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억울했지만 숨죽여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튀어나온 못이 되어 망치를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새 튀어나와 있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에서 주인공 찰리는 공장 노동자인데 얼떨결에 노동자 시위 주동자가 된다. 

모르는 노동자가 잠시 깃발을 들어달라고 부탁하고 마침 경찰이 나타나 깃발을 들고 있는 찰리를 주동자로 오해해 쫓아온다. 

찰리는 경찰이 쫓아오니 도망가고 깃발이 나부끼니 많은 노동자가 찰리를 뒤따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취업을 했을 때 찰리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잡지사에 기자로 입사해 막내로 일을 배우고 있을 때였다. 

내 바로 위 선배는 부산 출신의 여자였는데 나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이유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선배는 내가 들어오기 전에 잡지사에서 이러저러한 힘든 일을 겪었던 것 같다. 

나는 첫 사회생활에 긴장을 했고 처음 취재를 나갈 때는 인터뷰 한 번에 모든 기운이 빠지고는 했다. 

취재를 마치고 회사에 들어가기 전 회사 옆에 작은 잡화가게를 들렸다. 

회사는 고층 빌딩이 있는 번화가였는데 어울리지 않게 후락한 잡화가게가 있었다. 

그 잡화가게는 식당도 편의점도 아니었는데 라면을 끓여서 팔았다. 

나는 회사로 복귀하기 전 잡화가게를 들러서 라면을 먹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하루에 4끼를 먹어도 몸무게가 점점 빠졌다. 

선배의 비협조와 냉랭함에 우울했지만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집장 손님이 왔고 편집장이 커피를 부탁했다. 

딱히 어느 직원에게 부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잡지사 사무실 자신의 책상에서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말했다. 

“아, 차가 없네? 커피도 없나?”

그러자 선임 선배가 옆 후배를 쳐다봤고 후배는 옆 후배를 쳐다봤다. 

나는 막내라서 편집장과 가장 먼 책상에 앉아있었다.

도미노 조각이 쓰러지듯이 선배들 고개가 옆으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 곧 내 차례가 올 것을 알았다. 

도미노 마지막 조각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편집장은 커피를 종종 마셨으니 내가 커피를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식은땀이 났다. 

옆 책상 선배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선배를 보고 말했다. 

“저는 커피 못 탑니다.”

너무 긴장해서 목소리는 경직되었고 소리도 조절이 안 되어 컸다.

조용한 사무실에 내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몇 초 지나지 않아서 편집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가 막내에게 커피 심부름 시켜!”

편집장은 벌게진 얼굴로 손님과 직원을 번갈아 봤다. 

직원에게 커피 심부름 시키는 구시대적인 직장으로 보일까 봐 화가 난 것 같았다. 

사실 커피 심부름이 맞지만 편집장은 직원이 자발적으로, 가족적인 자세로 커피를 가져다주길 원했던 것 같다. 

심부름이지만 심부름이 아니게 보이면서 대접받기를 바란 것이었다. 

선배들은 커피 심부름에 대해 불편하지 않았을까?

자신들은 하기 싫지만 편집장에게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어서 후배에게 전달한 것 같았다. 

나는 싫으니 네가 해라. 

사무실 평화를 위해서. 

원하지 않게 그 평화를 내가 깨게 된 것이다. 

내가 커피를 타지 못한다고 한 것은 구시대적 회사 문화에 저항한 것이 아니었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만 내가 막 회사에 취업했을 때는 믹스 커피도 아닌 인스턴트 커피와 프림과 설탕이 따로 있는 커피였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저는 커피를 조제하지 못해요.”

그런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떨리는 큰 목소리로 오해할 발언을 한 것이다. 

부산선배는 화가 나고 당황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더니 발딱 일어나서 커피를 조제했다. 

사무실은 빙하시대처럼 온기가 사라졌고 나는 내 첫 사회생활이 어두워질 것임을 직감했다. 

다음날부터 퇴사할 때까지 부산선배는 나를 괴롭혔다. 

나는 해명도 할 기회조차 없이 되바라진 저항의 아이콘이 되어서 힘들게 회사생활을 했다. 

나도 모르게 거스르는 자가 되었다. 

같은 줄에 서 있는 사람들이 뒤로 한 발 물러서서 자리에 남아 있던 내가 앞으로 나온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커피를 조제하지 못한다는 의미임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던 이유는 커피 심부름이 부당하다는 생각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 뒤로 편집장은 자신의 손님이 오면 스스로 커피를 조제했다. 

사무실 커피 심부름은 사라졌다.      




과거에는 얼결에 거스르는 자가 되었다면 요즘은 의식해서 거스르는 자가 되려고 한다. 

내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느끼면 자신을 이해하게 되어 조절이 가능하다. 

긴장에 파묻히지 않아서 하고 싶은 말을 적절하게 하게 된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내 안에 자꾸만 올라오는 질문과 의문으로 거스르는 자가 된다. 

질문이, 의문이 옹달샘처럼 퐁퐁 샘솟는다. 

다르다는 것은 새로운 관점이 된다. 

거스르는 것은 변화를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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