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없애는 방법
심리상담사는 삶이 편안할까?
상담사인 나 역시 알아도 잘 안 되고
때로 알기도 싫고 나만 애쓰는 것 같고
이런 고통이 끝없을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
대신 알아차림과 멈추는 브레이크가
잘 활성화되는 정도?
상담사란 직업은 자신 이해가 필수라서
공부를 계속하고 수련도 받았다.
덕분에 내 의식과 무의식을 더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고집스럽게 버티는 무엇이 있다.
나를 알아가며 내담자와 상담을 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달라진 것은
"허용"이다.
허용은 "자비"다.
자비는 단순히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비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 수용하는 것이다.
내 모든 것에 열리는 것.
자기 자비가 늘어나면서
타인을 향한 자비도 확장된다.
보이지 않는 무의식, 역동에 휩쓸려
자동적인 언행을 하는 가족, 남편을 대하노라면
힘이 들고 갑갑했다.
그런데 요즘 애잔한 느낌이 먼저 번진다.
토르 망치로 고통을 박살내고 싶어 하는 가족과 남편을 보면
그럴 수 있지, 오죽하면 이런 생각들보다
(이런 생각들도 도움이 되지만)
슬프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마음속에서 샘물처럼 퐁퐁 올라온다.
나는 그 느낌을, 강아지 쓰다듬듯
고양이를 안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느낌에 그대로 머물면 상대 고통이
빗물처럼 내 마음에 스민다.
그 순간 자비가 우산처럼 펴지며
상대가 비를 피하길 바란다.
상대나 나나, 관계 책임이 누구에 더 있거나 말거나
무의식 때문이거나 말거나 앞으로 성장을 하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없이 그저 우산 아래에서 함께 비를 피한다.
상대 얼굴에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르나
오랜 고통이 흐른다.
고통의 물이 한 방울 씩 떨어진다.
낙숫물이 된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과 반복되는 노력이
보이지 않지만 작은 변화를 일으킨다.
토르가 휘두르는 망치가 있다면
고통의 바위를 당장 산산조각 내버리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없다.
내 가족과 남편에게도 대부분은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 왜 내게 토르 망치가 없느냐고
분통을 터트리고 주지 않은 사람(부모)을 원망하는 것은
고통을 줄일 때 헛된 일이다.
내가 토르 망치를 갖지 못한 것처럼 부모 역시 없었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은
반복되는 고통과 몸부림이다.
차라리 받고 싶지 않은 유산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낙숫물이 된다.
고통을 부수지 못할 것 같은 낙숫물은
끊임없이 방울진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을 수 있을까?
못 부수면 어쩌지?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면서도 물방울은 떨어진다.
어느 순간 낙숫물 자체에 집중된다.
떨어지는 물방울은 고통을 이해하려는 고통이다.
불안과 두려움이란 물방울은 떨어지고
다시 물방울이 쌓이고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반복을 명상처럼 집중한다.
바위를 부수고 싶다는 욕망이 잦아들며
고통이 내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과
고통이 물방울이 되어 순환함을 목격한다.
머리와 마음으로 알게 되는 순간
고통의 바위는 쪼개진다.
작아진 바위에 다시 낙숫물이 떨어진다.
물방울의 순환을 비난하지 않고 바라본다.
물방울 자체에 집중하면 더 이해하게 된다.
이해는 고요함을 주고 고요함은 이해를 준다.
들숨과 날숨 사이
숨이 멈추는 찰나에 머문다.
평가도 비난도 욕망과 불안,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는
완벽이란 개념으로 설명 불가한 순간이다.
고통은 자체의 힘을 잃는다.
그러니 토르 망치 역시 필요하지 않다.
토르 망치가 없는 것과
반복되는 고통으로 좌절한
남편과 카페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는 내 마음 안에 있다가
입 밖으로 말이 되기도 한다.
내 고통이 낙숫물처럼 순환함을 본다.
남편의 고통이 빗물처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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