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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백 Sep 13. 2023

역시 애들은 잘 크고 있군요.

내 앞가림부터 잘 합시다아.

불꽃같은 주말을 보내고 난 월요일, 나는 파김치처럼 축 처져 있었다. 이날 우리 집은 아이스크림 파티를 하기로 했다. 지난 일요일 우리 가족은 여느 때처럼 야외로 나들이를 갔다. 그런데 대단이가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동생이 먼저 시비를 걸었음에도 똑같이 대거리를 하지 않고 말로만 집요하게 사과를 요구했다. 아빠는 그러나 너무 집요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나는 대단이에게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었다. 전교 1등을 해도 이렇게 기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대단이가 장족의 발전을 했다!! 그래서 월요일 퇴근 후 나는 아이들을 모두 하원시키고 배스킨라빈스에 갔다.


배스킨라빈스에 가면 항상 싱글 주니어만 먹는데 이 날은 특별히 파인트를 먹기로 해서 대단이가 매우 신이 났다. 세 가지 맛을 먹을 수 있다니!!! 다만 우리 집 뽀뽀가 콘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해 뽀뽀만 따로 콘을 먹고 대단이와 나는 둘이 파인트를 먹었다. 더운 날이었음에도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었더니 속에서 냉기가 돌았다. 대단이는 나보다 훨씬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었음에도 멀쩡했다. '장 하나는 타고났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른 놀이터에는 대단이의 친구들이 꽤 있었다. 그곳에서 잠깐 놀고 있는데 뽀뽀가 신발은 다 벗어던지고 맨땅을 굴러 다니면서 놀고 있었다. 흡사 땅거지 같은 몰골이었다. 체력이 바닥이 나 버린 나는 몇 번의 제지에도 아이가 그치질 않자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대단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로 걸어가자 뽀뽀가 막 따라 나왔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에서 뽀뽀는 절대 따라 나오지 않아서 끌고 가야 했다. 뽀뽀도 참 많이 컸다.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을 씻겼다. 우리 집은 이틀에 한 번 머리 감기가 국룰이다. 아이들이 워낙 씻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엄마아빠도 가뜩이나 씻기는 것도 힘든데 매번 실랑이하는 것도 지겨워서 머리는 이틀에 한 번씩 감는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노는 통에 땀으로 목욕을 한 터라 머리를 안 감을 수가 없었다. 대단이는 왜 국룰을 위반하냐며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울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고 뽀뽀부터 씻겼다. 오마이갓. 시커먼 때국물이 줄줄 나왔다. 도대체 얘는 왜 이렇게 땅바닥을 굴러 다니면서 노는 것일까? 그래도 뽀뽀가 참 많이 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지 같은 몰골을 하고도 안 씻는다고 떼를 부리는 통에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고는 했다.


뽀뽀를 씻기고 여전히 거실에 드러누워 울고 불고 있는 대단이를 욕실로 데리고 갔다. 너무나 분해서 계속 엉엉 울고 있었다. 대단이는 연속 이틀 머리를 감으니 내일도 모레도 머리를 안 감는다고 선언했다. 나는 씻는 이유는 청결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니 더러우면 씻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뽀뽀는 안 씻는다고 하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데 대단이는 울면서도 욕실로 간다. 참 착하다.


대단이는 규칙이나 루틴을 본인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본인의 기준이란 것이 극히 주관적임에도 딴에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의 기준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을 어려워한다. 대단이는 머리를 이틀에 한 번 감는 것으로 기준을 세우며 머리를 감을 때 생기는 싫은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다. 머리를 안 감아도 되는 날의 마음의 여유가 박탈된 순간 너무도 억울했을 것이다.


뽀뽀의 머리를 말려 주면서 뽀뽀가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엄마, 반짝친구 예쁜이가 자기가 그린 그림을 '이거 귀엽지?' 하면서 보여 줬어. 근데 하나도 안 귀여웠는데 귀엽다고 해줬어."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가나다라도 못 읽는 우리 뽀뽀가 저렇게 친구의 마음을 배려해 주다니! 열여섯 다음에 열여덟을 외치는 우리 뽀뽀는 마음 알아주기 영역에서는 수재인가 보다. 반면 딱히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한글을 떼고 숫자도 척척 알아서 터득했던 우리 대단이는 안타깝게도 이 영역에서는 한참 뒤처져 있다.

뽀뽀가 열여섯 다음에 열여덟을 외치면 모두가 귀엽다고 웃어 주지만 대단이만 혼자 "'저런 멍청이!"라고 손가락질한다. 알았어, 알았어. 질투하는 것 다 알았어.


그런 대단이도 친구네 누나가 집 앞에 살짝 두고 간 여행선물을 보고 "참 고맙네."라고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아이들마다 잘하는 것이 있고 서툰 것이 있다. 다만 저마다의 속도로 배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가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는 순간에도 그 이유가 헤아려지면 화가 나지 않는다. 체력이 바닥이 났음에도 이 날 나는 아이들에게 과하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물론 놀이터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긴 했지만. 엄마도 사람이니까 너네가 이해해.


아이들 머리 감기 담당인 남편이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들이 다 씻은 것을 보고 매우 좋아라 했다. 이 날의 수혜자는 남편이었던가. 곧 아님이 판명됐다. 남편은 늦은 시간까지 대단이의 종이접기 노예로 역할을 다 해야 했다. 존경합니다,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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