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enie Jul 19. 2023

#중경삼림

내가 우는 날엔 우리 집 수건도 울지요

10년째 비닐 포장만 뜯고 한 번도 틀어보지 않은 DVD세트가 있다. 왕가위 감독의 컬렉션이다. <중경삼림>, <열혈남아>, <아비정전>, <타락천사> 네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창가와 가장 가까운 책꽂이 우측 상단에 놓아둔 탓에, 매일 커튼을 열 때마다 언젠가 봐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다. 네 작품 중에 두 작품은 이미 DVD 세트를 구매하기 전에 보았다. 앞으로도 언제 다 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마치 젊은 날의 트로피(?) 같은 애장품이다.


어느 가을, 내 인생 진로에 대해 처음으로 도박을 건 적이 있었다. 내가 원하는 사회과학대학 전공을 위해서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휴학계를 내고 그 해 겨울에 편입 시험을 봤다. 수험과정이 모두 끝나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기까지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하루 종일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합격되지 않는다면 한 해 더 준비를 해야 하는 건가, 학원을 더 다녀야 하나, 학원비는 어떡하지, 부모님께는 뭐라고 하지, 내가 벌면서 공부하면 공부를 많이 할 수는 있는 걸까, 공부할 수 없다면 학벌주의 사회에서 내 인생은 이대로 끝나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 달 동안 밤낮으로 영화만 주야장천 보았다. 프롤로그에 적었던 바로 그 수업! 영화를 매개로 온갖 발표자료를 신나게 만들며 진행했었던 그 수업의 백데이터가 바로 이때 나왔다. (합격된 첫 학기에 들었던 수업이었기 때문에 모든 기억이 생생할 때 활용할 수 있었다.) 예전 명작들을 찾아서 보는 재미도 있었는데, 그때 인상 깊게 본 영화 중에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새>, <싸이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 같은 작품들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와 같은 1950년~60년대 유명 헐리웃 배우들의 얼굴팬이 되었다. 그녀들의 웬만한 출연작을 섭렵했다는 생각이 들 무렵, 그동안 왠지 낯설고 촌스럽게 느껴졌던 90년대 전후 홍콩영화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 첫 작품은 <영웅본색>이었다. 서양에 <대부>가 있다면 동양은 <영웅본색> 아닌가! 감탄하며 후속 편까지 너무 감동적으로 보았다. 특히 장국영은 얼마나 멋지던지. 당연히 장국영이 부른 주제곡들도 플레이리스트에서 무한 재생할 수밖에 없었다. SBS 최장수 예능 <런닝맨>에서 유재석의 부캐 유혁이 <영웅본색> 시리즈의 주제가 ‘당년정’과 ‘분향미래일자’를 흥얼거릴 때마다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모른다. 이후 장국영의 작품들을 연달아 보기 시작했고 데뷔 초 짱구 눈썹을 하고 출연한 <영웅문>까지 합쳐서 30편 가까이 보았다. 광둥어가 대륙의 표준어였다면 장국영을 향한 팬심으로 열심히 회화 공부를 했을 것 같다. 그랬다면 그 이듬해 HSK 5급 230점을 맞고도 이렇게까지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하지는 않았을 텐데 여러모로 아쉽다.


배우 장국영을 좋아하지만 사실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천녀유혼>의 순박한 청년 영채신을 제외하고, 장국영이 맡은 배역들은 대부분 강압적이고 폭력성 짙은 마초 느낌의 캐릭터가 많았다.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에서 아비도 마찬가지였다. 아비는 바람둥이다.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내면의 트라우마를 가진 채, 그 어떠한 연인과도 안정적인 관계를 이어 나가지 못한다.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연인이 나타날 때마다, 아비는 모든 마음의 문을 닫고 그녀를 다시 밖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의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아비정전>은 제목 그대로 ‘아비’의 이야기지만 ‘아비를 잊지 못하는 그녀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루아침에 끝난 사랑을 이해할 수 없는 그녀들은 여전히 아비의 주변을 맴돌며 그를 잊지 못한다. 장만옥이 연기한 수리진은 날마다 오후 3시에 찾아오는 아비의 열렬한 구애에 못 이기는 척 연인이 되었다가 결혼하자는 한마디 때문에 차였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처량하게 서 있는 수리진의 뒷모습이 말한다. 머리로는 그가 이미 떠났다는 것을 알지만 가슴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매몰차게 변해버린 이 남자가 그때 그 다정한 남자는 맞는지, 나는 누구를 사랑했었고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수리진이 깨닫게 된 교훈은 아비에게 연인이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소모품이지 동격의 동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리진의 자리를 꿰어 차고 의기양양했던 루루도 결국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


<아비정전> 이후로 왕가위 감독의 다른 작품들도 연달아 보게 되었다. 장국영, 장만옥, 양조위, 유덕화, 임청하, 양가휘, 유가령 등등 당대 유명했던 배우들이 함께 출연하는 영화가 많았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수록 다음 작품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새롭게 발견한 놀라운 사실도 있었다. 왕가위 감독의 작품을 보다 보면 서로 연결되는 유사성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사뭇 충격적인 것은 모든 영화가 사전에 계획된 대로 만든 작품이 아니라고 한다.


왕가위 감독의 창작 스타일은 즉흥적이다. 현장에서 즉석으로 시나리오를 쓰면서 더 좋은 영감을 찾아 나가는 방식을 택한다고 한다.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쓰던 소설과 인물의 설정이 후속작 <2046>의 이야기로 이어져서 감독이 사전에 영화를 치밀하게 구상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정작 촬영하는 배우들은 다음 대사가 무엇인지 몰라서 힘들었다고 한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지나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반복하는 작품들이 많다. <아비정전>, <중경삼림>, <동사서독>, <2046> 네 가지 영화는 현재, 과거, 미래, 현실, 가상의 배경 여하를 막론하고 옛 연인을 추억하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대체로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사랑에 얽매여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평론을 찾아보면 90년대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둔 사회적 불안과 허무의 시선에 빗대어 해석하는 시각도 많고,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중경삼림(1994)>이 손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작품 중에서 가장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작품이야말로 <중경삼림>이 아닌가 싶다.


<중경삼림>의 화자는 이제 갓 실연당한 두 남자다. 경찰 223(금성무)과 경찰 663(양조위)이 각자의 상처 난 마음을 조금씩 보듬어가는 과정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았다. 1부는 만우절에 이별통보를 받고 방황하던 경찰 223(금성무)이 금발 가발의 여인(임청하)을 만나게 된 이야기, 2부는 스튜어디스였던 전 여자친구에게 차인 경찰 663(양조위)이 단골 샐러드가게 종업원 페이(왕페이)와 얽히게 되는 이야기다.

  <중경삼림>은 대사 하나하나가 명대사다. 둘에서 혼자가 되어 느끼는 외롭고 쓸쓸한 감정에 대한 독백이 생활 곳곳에 녹아 있다. 두 남자는 이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해 자기 합리화를 시작한다. 때로는 오글거리고 유치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인상 깊다. 평소 생각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시야를 보여준다. 이별을 통해 사랑의 쓴 맛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이 남자들은 일상의 시인이 되었다.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경찰 223은 전 여자친구의 연락을 기다리며, 그녀가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자신의 생일인) 유통기한이 5월 1일까지인 것만 골라 모은다. 4월 30일이 되어 더는 5월 1일 자 유통기한의 통조림을 판매하지 않자, 그는 점원과 설전을 벌인다. 왜 새것만 찾냐고! 파인애플 캔의 기분은 생각해 봤냐고! 그러다 세상에 유통기한이 없는 것은 정말로 없는지 홀로 고뇌한다. 1부 후반에 이르러 만약 사랑에도 유통기한을 정한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는 소망을 읊조린다.




‘그녀가 떠난 후 이 방의 모든 것들이 슬퍼한다.’

경찰 663은 전 여자친구가 떠난 뒤로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모든 물건을 향해 말을 건다. 세수를 하려다가 얇아진 비누의 마른 몸을 걱정하며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한다. 빨래한 수건을 널면서 수건이 울 땐 기분이 좋다고 여전히 감정이 풍부한 수건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며 흐뭇해한다. 인형을 번쩍 들어 안고 너무 더러워졌으니 돌아다니지 말라고 훈계를 한다. 그러던 그의 집에 페이가 옛 애인의 흔적들을 하루하루 정리하고 새롭게 채우기 시작한다. 미세하게 변하는 집안의 모습처럼 경찰 663의 마음도 조금씩 다음 사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된다.



<중경삼림>에는 격정적인 로맨스도 없고, 애틋하고 절절한 사연도 없다. 그저 한여름 밤에 창문을 열어둔 채 모기향을 피워 놓은 어느 날, 더운 공기의 틈에서 새벽의 찬 공기를 잠깐이라도 만났을 때의 쾌감을 선사하는 영화 같다. 장노출의 타임랩스 같은 <중경삼림>의 영상은 마치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빨갛고 노란 초록의 이미지를, 넓고 납작한 페인트 붓으로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정신없고 강렬하다. 그리고 2부의 시작과 끝을 지배하는 마마스 앤 파파스의 올드팝 ‘California Dreaming’을 끊임없이 흥얼거리게 된다. 어느새 ‘California Dreaming’은 <중경삼림>이라는 절대 불변의 등가 공식이 성립된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집안을 다시 둘러보면 보이는 사물마다 <중경삼림>의 대사들이 떠오른다.


영화계에도 레트로 열풍이 불어서 최근 2년 새 재개봉 작품들이 많았다. <중경삼림>도 2021년 3월 4일에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새롭게 개봉해 주목을 받았다. 요즘 20대들에게 <중경삼림>을 비롯한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이 다시 유행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마도 불안한 청춘에 대한 위로의 기운을 감독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어서가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마지막으로 <중경삼림>이 20대의 나에게 말해준 응원 세 가지를 앞으로 감상할 이들을 위해 적어본다.


1. 다양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보자.

2. 오늘 하루도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해 주자.

3. 용기를 가져보자, 새로운 시작을 여는 것처럼




스튜어디스가 되어 돌아온 페이는

물에 젖어 행선지를 알아볼 수 없는 가짜 종이탑승권을

1년간 소중히 간직해 온 그에게 새로 티켓을 만들어 주기로 한다.

어디로 가고 싶냐는 물음에 그가 답한다.


‘어디든지,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전 06화 #매드맥스, 28일 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