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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ie Jul 18. 2023

#인셉션, 바닐라 스카이

행복한 시간을 영원히 꿈속에 가둘 수 있다면

유년시절 집에 있었던 어린이 도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은 「금오신화」였다. 전반적으로 이미지가 매우 강렬한 책이었다. 진한 남색 바탕의 표지에 책의 등장인물들이 원근감 있게 순서대로 그려져 있었다. 거칠고 투박한 그림체에 도깨비도 있고 염라대왕도 있었는데, 지금 떠올려보면 꽤 무서운 그림이었다. 좌측 상단에 아주 작게 영희와 철수를 닮은 어린이 두 명이 손잡고 걸어가는 그림만이 이 책은 어린이도 읽을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요즘 나오는 어린이용 「금오신화」 도서는 파스텔 톤에 화사한 이미지들이 많던데 아마 그런 책으로 읽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지 않았을 듯하다.


   내부의 삽화는 모두 흑백이었다. 먹으로 그린 듯한 동양화풍의 그림들은 오직 선으로 모든 것을 표현했다. 음영 묘사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금오신화」에 수록된 작품들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 극대화하는 것 같았다. 도적 떼를 피해 산을 넘어 피난을 가다가 지쳐서 뒤처진 부인이 앞서가는 남편을 부르며 옆에 있던 바위에 손을 얹어 기대면, 부인의 팔과 바위 그 사이 여백의 틈으로 작아져 버린 마을의 전경이 이들이 얼마나 멀리 도망쳐 왔는지를 보여 준다든지. 그리고 그 그림 어딘가에 그려진 도적들의 모습은 앞으로 다가올 이 부부의 불행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금오신화」에서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작품은 「만복사저포기」였다. 「만복사저포기」는 만복사에서 양생이 부처와 저포놀이(주사위 게임)를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만복사에는 해마다 청춘남녀가 모여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행사가 있었다. 부모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외롭게 살아온 양생이 부처에게 여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저포로 내기를 건다. 한 페이지 가득히 그려진 삽화에서 거대한 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청년 양생의 뒷모습은 작지만 힘이 느껴졌다. 길게 땋은 댕기머리를 하고 살짝 앞으로 몸을 낮게 조아린 채, 불상의 모습으로 스스로 저포를 던질 수도 없는 부처 앞에서 평생의 배필을 점지해 달라는 내기를 제시하는 양생의 뻔뻔하고도(?) 당당한 자세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연인 만나기에 절실했던 양생은 결국 부처와의 저포놀이에서 이기고 만복사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인의 초당에 머물며 단 3일을 함께 했지만, 속세의 시간으로 3년이 흘러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이미 3년 전 왜란 때 살해당한 양반집 딸이었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양생은 그녀의 부모를 만나 객지에 묻혔던 여인의 장례를 치러 주고 결국 둘은 헤어지게 된다. 평생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산으로 들어가 버린 양생의 소식은 그 뒤로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고 한다.


초반의 기세대로라면 다시 부처에게 새로운 짝을 만나게 해달라고 저포놀이 2탄을 제시했을 수도 있겠으나, 양생에게도 순정이 있었다. 그녀가 죽은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사랑했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명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더는 그녀를 만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어 보였다. 만약 누군가 양생에게 그녀와 함께했던 3일의 시간을 영원히 늘릴 방법이 있다고 제안한다면 그는 당연히 시도하지 않았을까?


<인셉션>의 코브, <바닐라 스카이>의 데이빗이 바로 그런 선택을 한 인물이었다.


  <인셉션>에서 주인공 코브는 드림머신으로 타인의 꿈에 접속하여 생각을 훔치는 것이 가능해진 가까운 미래에 꿈 추출 전문가로 활동한다. 모두가 꿈속에서는 이미 있던 생각을 훔치는 방법만 가능하다고 알고 있을 때, 그 사람에게 없던 생각을 심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바로 자신의 아내 멜 때문이다.


잉꼬부부 코브와 멜은 꿈속의 꿈을 실험했다. 꿈의 가장 밑바닥 단계인 무의식의 해변에 서로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들기에 이른다. <인셉션>에서 현실의 5분은 꿈에서 1시간이다. 꿈의 단계별 시간도 다르다. 1단계는 1주, 2단계는 6개월, 3단계는 10년의 세월이 흐르는데, 무의식의 해변이 자리한 림보 상태에 이르면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꿈을 현실로 믿는 순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코브가 멜에게 청혼했을 때 말했던 함께 늙어가자던 꿈처럼, 부부는 50년 이상의 세월을 꿈에서 보냈다. 코브는 꿈이 꿈인 것을 알았지만, 멜은 꿈과 현실을 판단하는 토템도 숨긴 채 꿈을 현실로 믿어 버린다. 결국 아내를 설득해 함께 깨어나기 위해 코브는 멜에게 지금 이 세상이 거짓이라는 생각을 심어둔다. 그리고 이 작은 생각은 멜의 모든 사고를 잠식해 버린다.


  부부는 꿈에서 깨어났지만, 아내는 여전히 현실과 꿈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했다. 꿈을 현실로, 현실을 꿈으로 착각한다. 꿈에서 죽어야 깨어나듯이, 아내는 지금의 이 현실에서 죽어야 한다고 믿는다. 오히려 자신이 굳게 믿는 꿈을 코브가 현실이라 주장하고 돌아가려 하지 않을 때마다 남편의 사랑을 의심한다. 결국 멜은 남편과 함께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남편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고 그의 눈앞에서 자살한다.


아내의 자살은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그를 옥죈다. 현실에서는 수배 중인 도망자가 되어 아이들을 만날 수 없다. 꿈에서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이 트라우마가 된다. 동료들과 꿈을 공유하는 중요한 순간마다 죽은 아내가 부활해 코브를 죽이려 든다. 아내에게 쫓기면서도 모든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코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도망가고 또 도망간다. 그리고 아무도 없을 때 혼자서 꿈에 들어가는 약을 투여하고 다시 아내를 만난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아내도, 지금 다시 만나는 아내도,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꿈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바닐라 스카이>의 주인공 데이빗은 날 때부터 난 놈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를 경영하며 막대한 부를 누리고, 뛰어난 외모에 남부러울 것 없이 자유롭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자신의 생일 파티에 친구의 일행으로 참석한 소피아를 보고 첫눈에 반해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데이빗은 한순간의 사고로 외모를 잃고 자신감도 잃고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힌다. 사람들이 데이빗을 떠난 것인지, 데이빗이 사람들을 떠난 것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확실한 것은 데이빗은 지금 혼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소피아가 그립다.


  성형수술로도 복구할 수 없다던 그의 외모는 의사들이 최후의 보루로 추천한 안면 보형물 덕분에 제 모습을 되찾고 이 과정에서 소피아도 데이빗의 재기를 돕는다. 건강도 회복하고 회사로 다시 복귀해 모든 것이 정상 궤도를 되찾았다고 생각했을 무렵 어딘가 이상했다. 지금 데이빗이 사랑하고 있는 소피아는 이전에 알던 소피아가 아니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도시도 겉모습만 익숙할 뿐 진짜가 아니었다.


  과거의 데이빗은 계약을 했다. 죽은 뒤 냉동인간 상태가 되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꿈,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도록 LE라는 생명연장회사에 남은 인생을 맡겼다. 다행히 데이빗에게는 아직 선택의 기회가 있었다. 다시 그가 원하는 인생을 영원히 꿈으로 꾸게 될지 아니면 이미 150년이 지난 세상 밖으로 나가서 현재를 살아갈지. 그러나 여전히 자신이 기억하던 세상에 미련이 많고 화려한 과거가 그립더라도 꿈은 꿈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금오신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인정받는 단편소설집이다. 세종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매월당 김시습이 지은 한문소설로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용궁부연록, 남염부주지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 무엇 하나 현실적인 이야기가 없다. 5편 중 3편은 산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의 사랑을 다루고, 나머지 2편은 꿈에서 용궁을 가거나 저승을 가는 내용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자,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관직을 내려놓은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던 사육신 동료들의 조각난 시신을 그가 직접 수습하여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금오산에서 칩거하며 쓴 책이 「금오신화」다. 문인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현실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꿈, 그리고 세상에 없는 배경을 도피처 삼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꿈을 꾸되, 현실을 마주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양생의 사랑은 비록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함께 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했다. <인셉션>의 코브도 꿈속에서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마주하고 온전히 그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바닐라 스카이>의 데이빗도 자신이 설계한 꿈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었지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낯선 세상이라도 진짜 인생을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미련을 붙잡아두기 위해 지나간 시간에 얽매인 순간이 있었다면, <인셉션>에서 무의식의 아내를 떠나보내는 코브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려보자.




당신이 너무 그립지만

우리 시간은 이제 끝났어

이제는 당신을 보낼 거야, 영원히


I miss you more than I can bear,

But we had our time together.

And I have to let you go.

I have to let you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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