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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ie Jul 18. 2023

#업(UP)

그때의 모습은 아니더라도, 그때의 추억은 계속되겠죠

2021년 7월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었던 나의 모교가 서울공예박물관으로 바뀌어 개관했다. 고등학교 시절은 소중한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즐거운 추억도 많았던 시기다. 하지만 그때 그 추억이 담긴 장소가 이제는 없다. 정류장 근처에 학교 정문이 있다 보니, 박물관 설립 계획이 발표 난 이후로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공사 중인 학교 주변이 얼마나 많이 달라지고 있나 창밖으로 살펴보곤 했다.


모교의 자리는 본래 1881년 고종 때 지어진 안동별궁 터다. 안동별궁은 왕실의 거처였다가 마지막 황제 순종의 가례 등 왕실 행사에 쓰이던 곳이었다고 한다. 학교 정문 왼쪽에서 삼청동까지 이어지는 감고당길은 tvN 드라마 <도깨비>에서 주인공들이 비 오는 날 스쳐 지나간 돌담 배경으로도 나왔다. 정독도서관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분식 맛집 ‘먹쉬돈나’와 ‘경춘자의 라면땡기는날’이 있다. 친구들과 항상 매워서 잘 먹지도 못하는 짬뽕 라면만 시켜 먹으며, 땀을 뻘뻘 흘리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정문 입구 좌측으로 연보라색 꽃잎과 초록색 덩굴이 예쁘게 어우러진 키 작은 등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종로경찰서가 가까워서인지 그 아래 나무 의자에서 가끔 휴식을 취하는 경찰 아저씨들도 볼 수 있었다. 그 뒤로 가장 마지막에 생긴 둥근 건물은 도서관(정보관)이었는데, 상단의 타일이 무지개색이어서 학생들 사이에서 ‘풍문 유치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앙 본관은 건물이 많이 낡아서 복도에서 항상 나무 삐걱거리는 소리가 많이 났다. 2층쯤에 유일하게 파우더 룸이 있는 넓은 화장실이 있었는데, 출입문 입구에 공중파 프로그램의 기증패가 있었다. 아마도 90년대 후반에 인기 있었던 학생 대상 방송이었던 것 같다. 본관의 우측 대각선 끝자락에는 과학관이 있었다. 과학관에는 음악실과 실험실이 있었는데, 생물 수업이 가장 많았다. 생물 선생님은 중년의 나이가 무색하게 수줍음 많은 소년 같으셨다. 그리고 소풍 때 빵모자를 쓴 모습이 서울랜드 거북이를 닮으셨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당시 모교 입학은 선지원 제도로 추첨을 통해 학생을 선발했기 때문에 출신 동네가 다양했다. 친구들과 빨리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첫날부터 나만의 시그니처를 만들었다. 당시 재미있게 봤던 일본 드라마 <고쿠센>의 주인공 양쿠미 스타일을 따라 했다. 반 아이들 앞에서 둥글고 큰 안경에 양 갈래 머리를 하고 ‘앞으로 이렇게 하고 다닐 테니 이름이 기억 안 나더라도 나로 알아봐 주면 좋겠다.’고 했던 것 같다. 그 덕분에 한동안 ‘갈래씨’라는 별명이 생겼다.


첫 담임 선생님의 교과는 체육이었다. 선생님은 ‘공부는 못해도 체육 성적은 꼴찌 하면 안 된다(?).’는 새로운 지론을 갖고 계셨다. 하지만 덕분에 입시에 얽매여 지칠 수도 있는 고교 첫 시작이 다양한 체험으로 풍성했다. 여름에는 농촌활동, 겨울에는 스키장, 틈틈이 우리를 위한 작은 이벤트도 해 주셨다. 어느 무더운 날, 선생님이 과학관 옆의 체육관과 본관 사이에 있는 수돗가 터로 반 아이들을 모두 소집하셨다. 아침부터 점심까지 1인 1 백숙을 고아 주셨고 후식으로 냉커피까지 챙겨 주셨다. 지금도 여름이면 가끔 그날이 떠오른다.


학창 시절의 즐거운 추억을 가장 많이 쌓았던 공간이 5년째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이상했다. 예전의 학교 건물 골조를 그대로 활용해서 겉모습이 많이 바뀐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내가 편하게 느꼈던 공간이 아니었다. 공기마저 낯선 느낌이 들었다. 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는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근처를 배회하던 후배 학생들이 부러웠다. 그러나 이제 더는 부러워할 대상도 학교도 그곳에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공간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업(UP)>의 주인공 칼의 기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업(UP)>은 아카데미 시상식과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음악상과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동시에 휩쓴 픽사의 역작이다. 제목처럼 영화 포스터만 봐도 둥실둥실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흰색 구름 위에 형형색색 풍선을 가득 단 집과 옆에 난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빨강부리의 도요새 케빈, 그 아래 연한 갈색 털의 강아지 더그, 유니폼에 빼곡히 보이 스카우트 배지를 두른 꼬마 러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손으로 지탱하고 있는 주인공 칼 할아버지가 있다.


칼과 앨리는 일평생 모험을 꿈꾸는 환상의 짝꿍이었다. 어린 시절 만나 서로의 우상이었던 탐험가 찰스 먼츠를 함께 동경하며 사랑에 빠졌다. 세월이 흘러 칼과 앨리는 부부로서 인생 여정을 계획했다. 낡은 집을 한 군데씩 고쳐 나가면서 하루하루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며갔다. 함께 소풍도 가고 함께 책도 읽고 부부는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아이도 많이 갖자고 약속했지만 안타깝게도 부부는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칼은 실의에 빠진 앨리에게 어릴 적 꿈처럼 남미의 파라다이스 폭포를 가자고 새로운 계획을 제안했다.


하지만 여행 자금을 한 푼, 두 푼 모을 때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생겼고 그때마다 모은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 바쁜 일상에 치어 있다가 여행 계획이 다시 생각났을 때쯤 부부에게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았다. 어느새 칼은 무표정한 얼굴로 세상 모든 일에 심드렁한 노인이 되어 빈집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이 모든 역사가 영화 시작 5분 만의 이야기다.


칼의 동네에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칼은 앨리와의 추억이 남은 집을 내어줄 수 없었다. 이윽고 공사 인부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사고를 내고 강제로 양로원에 보내질 위기에 처한다. 칼은 앨리와 함께 한 집을 지키고 앨리와 못다 한 모험을 떠나기 위해 큰 결심을 한다. 하룻밤사이 오색빛깔 풍선을 셀 수도 없이 잔뜩 매달아 집을 통째로 하늘에 띄웠다. 목적지는 남미의 파라다이스 폭포다.


혼자 조용히 떠나려던 여행길에는 칼의 예상과 다르게 동반자가 많았다. 왕년의 칼처럼 세상 팔방 호기심이 많은 동네 꼬마 러셀과 신묘하게 생긴 도요새 케빈, 말하는 개 더그와 함께, 칼은 노년에 일생일대의 모험을 하게 된다. 앨리가 떠난 뒤로 칼은 항상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고집불통에 불만 가득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칼의 손길이 필요한 꼬꼬마들과의 여행이 계속되면서 점차 숨겨왔던 이타적인 모습을 보인다.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 숱한 위기의 상황에서 칼은 아집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세 가지를 버린다. 남은 풍선으로 집을 띄울 수 없게 되자 집안의 짐을 버리고, 앨리와 함께 했던 소중한 가구를 버리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집마저 버린다. 그토록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집을 떠나보내며, 칼은 ‘집은 그냥 집일 뿐이야.’하고 읊조린다.


  신혼 때부터 집안 곳곳 앨리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둘만의 보금자리를 한순간에 버린다는 것은 칼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곳으로 떠나 오기 전, 아등바등 집을 지키기 위해 칼은 얼마나 모진 사람이었던가. 부부가 함께한 약속을 지키지도 못하고 무심히 흘러버린 시간 앞에서 얼마나 회한이 들었을까? 앨리가 잠시 머물다 간 공간의 기운이라도 날마다 느끼지 않으면 혼자 남은 이 세상이 너무도 원망스러웠을 것 같았다.  


 그러나 칼에게 원대한 탐험의 꿈보다 소중했던 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이들이었다. 과거의 추억은 추억대로 묻어두고 현재의 갈 길을 나가야 우리에게도 더 밝은 미래가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리고 러셀의 배지 수여식에 보호자로 참석하며, 칼은 어린 날의 자신과 닮은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을 지켜주는 멋진 어른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칼은 앨리와 함께 평생의 탐험 목적지였던 파라다이스 폭포에 오지 못해 아쉬워했지만, 앨리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앨리와 찍은 앨범을 넘겨보다가 칼은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전에 본 적 없었던 앨리의 문구를 발견한다.


 

 

 

당신과 함께 한 모든 시간이 모험이었다고.

이제는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나라고.


Thanks for the adventure-

now go have a new one!

Love, Elie




이제 나의 추억이 담긴 모교는 그 자리에 없지만, 새로 생기는 박물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기억을 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만 알아볼 수 있는 과거의 풍경을 여전히 떠올리고 있을 친구들과 선생님들도 모두 어제보다 오늘 더 행복하기를 바란다. 먼 훗날 뉴스에서 서울공예박물관의 옛 모습에 대해 인터뷰한다면, 어제 가본 듯 이야기하는 호호 할머니가 되는 상상도 잠시 해본다.


안녕, 풍문여고!

너와 함께한 지난 고교 3년이 평생에 길이 남을 소중한 나날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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