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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ie Jul 17. 2023

인생의 반경에 언제나 도플갱어가 있었다

Part0. 의미 「어른이의 영감은 영화에서 온다(2022)」

내 이름은 아주 흔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김 씨’에 성을 제외한 ‘진희’라는 이름마저 흔하다. 물론 나의 본관이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를 기준으로 445만 명이 넘는 김 씨 1위 ‘김해 김 씨’가 아닌 3만 명 미만의 26위 ‘함창 김 씨’라는 미세하지만 중요한 배경 설명은 잠시 논외로 한다.


학창 시절에는 같은 반에 나와 이름이 같은 친구가 있어서 쌍둥이처럼 서로에게 ‘큰 진희’, ‘작은 진희’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담임선생님을 포함한 반의 모두가 그 친구보다 키가 10cm 이상 컸던 나를 ‘큰 진희’라고 불렀다. 사춘기에 이 불편한 칭호는 상당한 콤플렉스였다. 내가 내 이름을 온전히 가지려고 ‘크다’는 형용사를 매번 들으며 또래보다 키가 크다는 점을 하루에도 수십 번 입증해야 했다. 마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했는데 휴대폰 본인인증 절차마저 통과해야 홈페이지에 접속할 수 있는 느낌이었다.


사회인이 된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직장에서도 두세 달에 한 번은 문서 수신자에 나 대신 동명이인의 다른 분이 들어간다. 가끔 그룹 게시판에 다른 계열사의 동명이인이 마케팅 프로모션이라도 올리는 날이면 일면식도 없는 제3의 인물이 나에게 내용을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일일이 진실을 바로잡아야 하는 번거로운 임무는 나의 몫이었다. 타인의 마음속에 기억 남을 그 이름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이유였다.


이름의 주인이 된다는 것, 그 이름을 통해 ‘나라는 사람이 독립된 개체로 사회에서 인식되고 존재할 수 있다.’는 가설은 적어도 나의 생활 반경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리적인 이름은 정말 나라는 존재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을까?

애니메이션 양대 산맥 지브리 vs 디즈니 중에서 밸런스 게임을 해보자면 대체로 디즈니 작품을 더 선호하지만, 자아정체성을 상징하는 작품에 대해서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두 작품을 가장 최고로 생각한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존재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세워가는 10대 청소년기에 보았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그리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주인공 센의 본명은 치히로다. 가족들과 이사 가던 날 정체 모를 터널에 빠져 신들의 세계에 갇혀 버린 치히로는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온천장 마녀 유바바에게 자신의 본명을 빼앗기는 노동계약을 맺는다. 치히로는 센이라는 이름으로 하루하루 새로운 삶에 적응하면서 어느새 진짜 온천장 종업원 센이 되어간다. 그 사이 자동차 뒷좌석에 누워 창밖을 보면서 공상에 빠지던 철부지 10살 소녀 치히로의 현실 자아는 점차 사라져 간다. 


센이 가족들과 함께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열쇠는 단 하나, 더는 떠오르지 않는 본명을 기억해 내는 것이다. 영화는 인물들이 자기 본명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그 어느 순간에서도 자아정체성을 깨닫는 것이 인생의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마치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옛 속담 같다.


미야자키 감독의 또 다른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자아를 잊지 말고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는 계속된다. 젊은 소피는 극 초반 마법에 걸려 하루아침에 할머니로 변해버린다. 20대가 어느 날 80대의 삶을 살아야 한다면 절망스러울 법도 한데, 소피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담은 행동과 말을 할 때면, 찰나의 순간이지만 다시 본래의 젊은 소피가 된다. 정작 초반부의 젊은 소피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할머니가 돼서는 모든 등장인물의 보호자가 되어, 누구보다 용기 있게 책임감 있는 목소리를 당당하게 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센이 또 다른 주인공 하쿠의 본명을 찾아주었듯이, 소피도 자신감을 잃고 실의에 빠진 하울이 다시 본래 삶의 궤도를 되찾도록 정신적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 두 작품을 보고 나면 내 인생의 정답은 결국 나에게 있고 내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길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몫이 아니라, 난제를 함께 헤쳐나가는 주변 사람과의 연대를 통해 우리는 한층 더 성숙하고 지혜롭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


어릴 때는 평범한 이름이 싫었고 지금도 가끔 흔한 이름으로 겪는 일련의 오해들이 달가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불리든지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종종 평범한 이름 뒤에 숨는 아늑함을 즐길 때도 있고, <알라딘> 속 재주 많은 램프의 요정 지니(Genie)와 발음이 같아서 그렇게 지칭될 때는 은근히 기분이 좋기도 하다. 그새 정이 많이 든 이름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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