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어느 한 칸 #4
늦은 오후, 부산의 해운대 해변은 서서히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파도 위로 금빛 물결이 일렁였다. 한산한 해변에선 간간이 낙엽을 밟는 소리와 바람이 부는 소리만 들렸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마음까지 얼릴 정도는 아니었다.
해영은 고요한 파도를 바라보며 해변가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그녀에게 특별한 장소였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놀러 왔던 해변이자, 대학 시절 자주 걸었던 길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30대 초반,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출판사에서 일하며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해영은 결국, 밀려갔던 파도가 다시 밀려오듯 오래전 자신이 사랑하던 해운대의 이 해변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는 원래 남들 앞에서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타인에게는 냉철하고 이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내면은 언제나 복잡한 감정들로 뒤엉켜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더 여린 마음을 숨기고 지켜내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싸매다 보니, 사람들은 해영이 차가운 사람이라고 오해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해영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허전함과 외로움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감정들이 오늘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때, 해영의 시야 끝자락에서 낯선 남자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강도윤. 그는 고향이 부산인 남자였고, 현재 서울에서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오늘 그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해변을 산책하다가, 해영을 발견했다.
도윤은 어렸을 때부터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가족 문제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자립해야 했고, 감정적으로 타인에게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그런 그가 서울 생활을 하며 무역 회사에서 차근차근 승진을 쌓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남들이 보기엔 성공적이고 안정적인 삶이었으나, 그의 내면은 고립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역시 인생의 궤도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그는 해영을 멀리서 보자 무언가 이끌리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그녀의 고요한 분위기와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표정에 자연스럽게 끌렸다.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안된다. 도윤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도윤의 느낌은 언제나 도윤을 구해주곤 했다. 이번에도, 도윤은 평소 하지 않을 행동을 하는 동안, 자신의 느낌이 자신을 창피하게 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여기 자주 오시나요?" 도윤이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묘한 무게가 느껴졌다.
해영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끔씩요. 당신은요?"
"저도요. 고향이라 가끔 생각날 때 오곤 해요." 도윤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둘 사이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해영은 그의 존재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낯선 이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편안함이 있었다. 해변에 앉아 있을 때처럼, 그와의 대화는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처음의 약간의 인사 이후에 둘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서 가만히 파도를 바라보았다. 밀려가고, 밀려오고. 해영의 발치까지 다가온 파도의 자국은 언제까지 이렇게 말 없이 있을텐가. 타박하는 것만 같았다. 해영은 고개를 돌려 도윤의 옆모습을 보았다. 단정한 얼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도윤의 모습은 고요했다. 그 고요의 곁에 앉아있는 시간이 해영은 따스하다 느꼈다. 왜 그럴까.
"여긴 참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해영이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도 이랬어요. 언제나 같은 바람, 같은 파도…"
도윤은 그녀의 말을 곱씹듯 들었다. "그렇죠. 변하지 않는 것들이 오히려 위안이 될 때가 있죠."
그의 말에 해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 점을 느끼고 있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 바다만큼은 언제나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윤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허전해 보이면서도 강인한 인상을 주는 그녀. 그와 같은 공허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은, 둘 사이에 흐르는 공감의 감정이었다.
"여기서 누구를 기다리시나요?" 도윤이 물었다. 그의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해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되찾으려고 왔어요. 이곳에서 어릴 때 느꼈던 감정들을 떠올리면,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아. 도윤은 그녀의 말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그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 그는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귀향 이상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돌아오죠. 하지만 찾을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요." 도윤은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해영은 그의 말에 무언가 깊은 울림을 느꼈다. 그와 자신은 닮은 점이 많았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두 사람. 바다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듯, 잔잔한 파도 소리를 계속해서 흘려보냈다.
도윤이 그녀를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차 한 잔 할래요? 따뜻한 게 필요할 것 같아요."
해영은 잠시 그의 제안에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와 나누는 대화가 마치 오래된 친구와의 대화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근처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안은 아늑했고, 따뜻한 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창밖의 어두운 바다와는 달리, 카페 안은 온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해영은 그와의 이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느꼈다. 도윤도 그랬다. 서로의 공허함을 메워주고, 이해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떠나갔던 파도를 타고 태어난 해변에 다시 찾아온 바다거북처럼. 도윤과 해영은 찾아와야 할 곳에 찾아와, 각자의 영혼이 태어나던 것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부산의 차가운 가을밤,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따뜻한 위로를 찾고 있었다. 해운대의 파도 소리는 그들의 고요한 마음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며, 앞으로의 인연을 예고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