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동거의 시작
-오빠
며칠 전 동생과 같이 술을 마시다 손님을 찾아 떠났던 남폰이다. 돈 없다는 말에 냉정하게 돌아섰던 여자가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왜?
-사정이 생겨서 빨리 이사 가야 하는데, 아마도 룸피니로 갈 것 같아.
-그래서?
-오후에 부동산 업자 만나서 계약하기로 했는데, 집에선 지금 당장 나가야 할 것 같아.
-그런데?
-지금 룸피니 갈 건데.
-아.
뭔가 할 말이 있는데 빙빙 돌리는 느낌이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지금 당장 집을 나와 룸피니, 그러니까 이곳에서 방을 구한다는 말인데 왜 나한테 연락했을까. 설마 짐 들고 갈 곳이 없어 연락한 걸까? 설마. 사람이 염치가 있지. 지난번에 그렇게 가 놓고는 저딴 이유로 연락했을 리가 없다. 아니다. 나라가 다르고 문화가 다를 수도 있다.
-설마 짐 놔둘 곳이 없어서 연락한 거야?
-진짜 짐 맡겨놔도 괜찮아? 오후에 만나기로 해서 3~4시까지만 놔두면 돼.
어이가 없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짐 때문에 연락했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이미 허락을 맡은 양 말한다. 짐 잠깐 놔두는 게 뭐라고 저리 간절하게 철면피 깔고 연락을 해야 하는 일인가? 이해가 안 된다. 그래 뭐 짐 정도야. 저렇게 간절한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그리고 머릿속 한편으로는 순간이나마 이 여자가 나한테 호감이 있어서 일부러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요즘 좀 살만 해졌나 보다.
-그래 와라.
-바로 출발할게 10분 뒤 로비에서 만나.
-그럴 필요 없어, D동 811호로 와.
문자를 보낸 지 20분 정도가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똑똑하며 노크를 한다. 올 사람이라고는 남폰 뿐이다. 문을 여니 그 앞에는 큰 캐리어 두 개와 캐리어 보다 큰 세탁 가방 하나가 놓여있다. 짐을 보니 남폰이 왜 잠시라도 짐을 맡겨두고 싶어 했는지 수긍이 간다. 저렇게 많은 짐을 들고 밖에서 기다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헬로?”
“들어와.”
큰길 하나를 건너 이곳까지 끌고 왔으면, 집안에 넣는 것도 혼자서 가능하겠지. 딱히 도와주지는 않는다. 남폰은 안간힘으로 짐을 끌어 현관문 문턱을 넘는다. 거실 한쪽 구석에 놔둔 내 캐리어 옆에 자신의 짐들을 놔둔다. 짐옆에서 뻘쭘하게 서서 날 쳐다본다. 손님은 아니지만 그래도 의자에 앉으라 권한다.
“저기 앉아.”
“어.”
“마사지사라면서 출근 안 해?”
“쉬는 날. 집에서 뭐 하고 있었어?”
“책 읽었어.”
예의상 질문을 주고받았을 뿐 서로에게 관심은 없다. 나는 조용히 핸드폰으로 책을 읽는다. 남폰은 핸드폰으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어간 웃기지도 않은 조작 몰래카메라 영상을 보고 있다. 계속해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슬슬 귀에 거슬린다.
“소리 조금만 줄이면 안 될까?”
대답 없이 소리를 줄인다.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시간은 침묵만큼이나 천천히 흐른다. 옆에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계속 의식하게 된다. 불편하기도 하지만, 카페에서 책을 읽을 때, 옆에 사람이 있으면 괜히 더 책에 집중하는 척하다 실제로 더 집중하게 되는 것처럼, 책이 술술 읽힌다.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듯하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오래된 연인이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일을 하면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역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인 듯하다.
천천히 흐르던 시간이 빠르게 움직인다. 벌써 3시가 넘었다. 4시에는 수영하러 가야 하는데. 남폰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혼자 내버려 두고 나가기도 그렇고, 아무런 존재도 아닌 사람 때문에 요즘 내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수영을 빼먹고 싶지는 않다.
“에이전트한테는 연락 안 와?”
“지금 바쁘다고 기다리래.”
“그럼 몇 시쯤? 나 좀 있으면 수영 가야 하는데?”
“6시? 그쯤 올 수 있다는데? 다녀와.”
슬쩍 눈치를 줬지만, 핸드폰을 붙잡고 영상만 보고 있다. 나가달라는 말을 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혹시 나에 대한 미련으로 연락할 기회를 엿보다 호감으로 여기까지 온 거라면. '혹시나?' 하는 상상을 한다. 나가라는 말을 하기가 망설여진다. 이성이 감성에 밀렸다. 남폰을 내보내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사실, 집주인이 나가는데, 손님이 집 안에 있어도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억지로 이유를 짜 맞춘다. 이유를 짜내고 또 짜내다 보니, 옹색한 이유를 하나 찾았다. 집안에 핸드폰과 지갑 말고는 귀중품이 없음을 생각해 낸 것이다. 거기다 핸드폰이 구형이라 훔쳐가지도 않을 것 같다는 변명도 해본다. 끝으로 지갑을 확인해 보니 100밧짜리 몇 장이 들어있다. 충분히 큰돈이지만, 이 돈을 훔치진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한다. 그래도 견물생심이란 생각에 핸드폰과 지갑 그리고 여권을 장롱 속 은밀한 곳에 숨겨두고 물안경과 수건을 챙겨 나간다.
“수영 좀 다녀올게.”
“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한다. 원래 같이 살던 사람이란 착각이 든다.
수영장에 도착해 몸을 푸는데, 뜬금없지만 오랜만에 제대로 된 수영이 하고 싶어졌다. 물에 첨벙 뛰어들어 자유형을 시작한다. 그런데 너무나 오랜만에 하는 자유형이라 그런지 팔도 어색하고 숨 쉬는 것도 어색하다. 원래라면 손을 한번 휘저을 때마다 한 번씩 숨을 쉬어야 하는데, 고개가 돌아가지 않는다. 고개에 신경 쓰면서 손을 휘저으면 발이 멈추고 발을 움직이면 손이 멈춘다. 계속해서 수영장 물을 마셔가며 예전의 감각을 떠올린다. 수영장을 두 바퀴 정도 도니 슬슬 예전의 감이 찾아진다. 팔 동작은 점점 작아지며, 동선이 예리해진다. 다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물장구가 쳐진다. 고개도 손동작에 맞춰 옆으로 돌아가 숨을 쉴 수 있게 됐다. 자세가 안정되자 있는 힘껏 손을 휘두르고 발장구를 친다. 그동안 육지 위의 거북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땅 위에서 방황하던 거북이가 물속으로 돌아온 것만 같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차고 팔과 다리에 힘이 빠진다. 몸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선다.
평소라면 40~ 50분은 했을 수영이 20분 만에 끝이 났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만 닦고 집으로 돌아간다. 합리화는 했어도 집에 있는 핸드폰과 현금이 걱정되긴 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가자 남폰은 소파에 누워 왜 벌써 왔냐는 듯 쳐다본다. 뭔가 집주인과 손님이 바뀐 것 같다. 고개를 저으며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며 신이 나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갈아입을 옷과 수건이 거실에 있다. 습관처럼 밖에 두고 온 것이다.
큰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나갈까? 내 살을 가리기엔 역부족이다. 물에 젖은 수영복과 티셔츠를 입고 밖으로 나가야 하나? 찝찝해서 싫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맨몸으로 나가볼까? 어쩌면 영상을 본다고 내가 벗고 나가도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그런데 그건 변태란 생각도 든다.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기로 한다.
“남폰, 내가 옷하고 수건을 안 들고 들어와서, 혹시 잠깐 침대방에 들어가 있을래?”
“응? 벗고 나와도 괜찮아. 난 상관없는데.”
다시 한번 이 여자의 직업이 떠올린다. 아.
“내가 상관이 있어.”
“그래.”
남폰은 순순히 방으로 들어간다. 빨래한 후 정리하기 귀찮아 거실 한쪽에 처박아 놓은 옷 무더기에서 수건과 옷을 꺼낸다. 옷을 다 갈아입고 방문을 여니. 남폰은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워있다.
“이제 나가 있으면 돼.”
“그런데 나 소파에 누워있어도 될까?”
“편한 대로.”
아까도 허락 안 맡고 누워 있던 거 아니었나? 내가 잘못 본 건가. 침대를 벗어난 남폰은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본다. 이제는 마치 자신의 집처럼 편해 보인다. 나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책을 읽는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이 감겼다.
응? 뭐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깜짝 놀라 핸드폰을 보니 아직도 6시가 안 됐다. 끙하는 신음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거실에서 남폰은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나갈 준비하는 거야?”
“어 배고파서 밥 사 오려고.”
“집 보러 안 가?”
“연락이 안 와서. 일단 밥 사 오려고."
순간 짜증이 올라와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떻게든 에이전시와 빨리 연락해서 나갈 생각은 없고 배나 채울 생각이나 하고 있다. 그래, 밥은 먹고살아야지. 혼자서 화를 내고 혼자서 합리화를 한다. 짜증을 가라앉힌다.
"오빠 것도 사다 줄까?"
기습적인 질문에 약간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모르겠다. 먹을 생각을 하니 허기짐이 느껴진다.
“뭐 먹을 건데?”
“콘도 앞에서 보고.”
“그럼 내 것도 사와 줄 수 있어?”
“그래, 뭐 사다 줄까?”
“너 먹는 거, 같은 거로.”
인사도 없이 문을 쾅 닫고 나간다. 그리고 잠시 후 국수 두 그릇을 사 왔다.
“이거 뭐야?”
“꾸웨이짭”
“쿠웨이잡?”
“꾸! 웨이 짭!”
“쿠 왜이 잡!”
“그냥 먹어.”
집 앞에 있는 노점상들이 유명한 미슐랭 맛집은 아니어도, 미식의 나라 태국 답게 아무 식당에 들어가도 기본은 한다. 후루룩 맛있는 국수를 허겁지겁 먹는다.
“태국 사람은 먹을 때 소리를 내지 않아.”
“무슨 소리야?”
“방금 후루룩 소리 낸 거 아니야?”
“어. 그런데?”
“태국에선 음식 먹을 때 소리를 내면 안 돼. 예의가 아니야.”
“어 그래 알겠어.”
옛 어른들이 쩝쩝거리면서 밥 먹는 걸 싫어하듯, 태국 사람들은 후루룩하며 면을 먹는 게 싫었나 보다. 싫다고 하니 조심해야지. 소리 없이 국수를 먹는다. 마치 고등학생 때 몰래 밤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새벽에 다시 몰래 집에 들어올 때 현관문을 닫는 것처럼 최대한 소리를 죽여 한 젓가락 한 젓가락 조심히 국수를 먹는다.
“그런데 오빠는 한국 사람이니까 괜찮아.”
“응?”
조심스레 국수 먹는 모습에 미안했는지, 말을 덧붙인다.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집 주인이고 앞에 사람은 불청객인데, 내가 왜 눈치를 보며 예의를 갖추고 있지 하는 당연한 물음이 들었다. 어디서부턴가 잘못됐다. 국수를 다시 후루룩 먹는다.
“집 보러 언제가?”
“방금 연락 왔는데, 오늘 안된대. 그래서 그런데 하룻밤 자고 가면 안 될까? 소파에서 잘게. 나 갈 곳이 없어.”
국수는 밥이 아닌 독이든 성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