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2)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본다
이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이들이 내 눈치를 안 보는 이유는 뭘까.
나는 관리직이란 책임과 약간의 권한을 갖고 이곳에 왔다.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결제에 내 사인이 들어간다.
하다못해 경비원 새 유니폼을 사는 것도 내 사인이 들어가야 살 수 있다.
상식적으로 이들은 내 눈치를 봐야 한다.
적어도 내가 말하면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무시한다.
이유가 뭘까.
아무 말 없이 저들을 지켜본다.
처음엔 눈치를 보더니 일주일 정도 지나자 자신들 편한 데로 일을 한다.
마스크를 쓰는 사람이 없다.
몸풀기 운동도 안 한다.
아침 미팅을 안 한다.
청소도 안 한다.
최소한의 일 빼고는 아무것도 안 한다.
처음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손님이 한 명 보였다.
군복을 입고 있는데, 군인 같지는 않다.
창고장은 당황해하며 접객실로 간다. 몰래 들여다본다.
창고장은 공금을 넣어놓고 다니던 가방에서 300,000rp를 꺼내 준다.
이번엔 노인이 찾아왔다. 돈을 꺼내준다.
사복을 입은 사람이 왔다. 또 돈을 꺼내준다.
이상하다. 돈이 너무 많다.
본사에 문의하니 대답대신, 파일을 하나 보내준다.
르바란 때 줘야 하는 후원금 목록이다. 목록에는 지역유지 명단과 후원금 액수가 적혀있다.
한국으로 치면 지역향우회, 군 향우회, 경찰서, 소방서, 마을 청년회 같은 단체가 쭉 쓰여있다.
이 중에서 진짜로 돈을 건네는 건 어딘지, 진짜로 얼마를 건네주는지는 알 수 없다.
내 권한 안에 일이지만, 내 눈밖에서 일어난다.
드디어 창고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를 찾았다.
창고장은 한국인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기에 내 눈치를 보지 않는다.
본사에서 호랑이처럼 울부짖는 이사의 호통을 귓등으로 듣는 이유도 이것이겠지.
무기력감에 더 할 수 있는 방법을 못 찾겠다.
생각의 평행선이 만들어졌다.
내가 월급 주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이들의 상식을 바꿀 순 없다.
이들의 상식으로 창고를 운영하면 나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나는 이들을 바꿀 수가 없고, 바꿀 수 없으면 떠나야 한다.
끝없는 평행선 같던 길에 출구가 보인다.
지난번에 써놓은 사직서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