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인도네시아
비자가 늦어지자 반쯤 홧김에 이메일을 보냈다. 메일에 비자 진행담당자를 지정해주지 않는다면 입사를 포기하겠단 내용이 적혀있었다.
비자를 만든다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회사에선 비자를 나보고 만들라 한다. 알아보니 당연하게도, 비자는 말레이시아에서 진행 후 받는 것만 외국에서 받아야 한다. 비자를 만들려면 말레이시아로 돌아가야 했다. 취업도 안 했는데 취업 비자를 만들러 다시 말레이시아로 돌아가야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메일을 보냈었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그리 간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메일 답장을 기다리기보단 동생이 알려준 부산시에서 진행하는 해외취업 프로그램에 일단 지원해놨다. 서류가 통과되더라도 말레이시아에서 오는 회신에 따라 면접을 보든 말든 정하면 될 것 같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얼마 뒤 서류가 통과됐다는 문자가 왔다. 하지만, 이메일은 회신 오지 않는다. 프로그램 면접날이 가까워지는데 메일 회신이 없다. 분명 읽긴 했는데, 답장이 없다. 그렇게 프로그램 면접에 참가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시, 프로그램에 지원하면서도 취업에 대한 기대보다는 2개월간 외국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의도가 불순했기에 순수한 진실로만 면접을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외국에 가고 싶다는 말을 외국에 취업하고 싶다로 바꿔 면접을 봤다. 면접은 무사 통과했고, 2개월간의 국내 교육을 받은 후 현지로 떠났다.
프로그램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하는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비슷한 예시를 들자면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의 보행기와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아기는 보행기 없이도 수십번 넘어지면서 걸음마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보행기가 있으면 덜 넘어지며 걸음마을 배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걸을 의지가 없는 아기는 보행기에 올려놔도 걸음마를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참가자의 의지가 중요했다.
해외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참가한 프로그램이다. 취업할 의지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국내 교육은 대충대충 받으며 시간을 때웠다. 하지만 막상 인도네시아에 가보니. 제법 흥미로웠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턴가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금씩 진심으로 프로그램에 임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성심성의껏 자카르타를 즐겼다.
아침 7시쯤 일어나 어학원에 갈 준비를 한다. 아침 9시 수업이라 굉장히 여유롭다. 아침은 거르고 수업을 듣는다. 보통 11시 반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사 먹는다. 점심은 어학원 건물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을 이용한다.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파당 음식부터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는 나시 구득이란 족자카르타 음식까지 아주 다양한 음식을 단돈 2천원에 맛볼 수 있었다.
4시면 어학원 수업이 종료된다. 그러면 곧장 킥복싱 체육관을 간다. 지난 몇 년간 운동을 쉬었어도 한때 프로도 준비했던 만큼 기본기는 튼튼했다. 그래서 체육관 코치는 나를 보면 “헤이 미스터. 런 런 런” 하며 기술 훈련은 필요 없으니 기초체력 훈련이나 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한두 시간 운동을 하고나면 땀이 쫙 빠진다. 기분이 좋다.
운동을 마친 후 체육관 앞에 있는 노점상에서 천원짜리 나시고랭을 산다. 저녁 7시쯤 피크타임때 오면 40~50분씩 기다려야 하는 동네 맛집이다. 운동을 마치고 바로 가면 6시가 조금 넘었기에, 기다릴 필요가 없다. 샤워를하고 나시고랭을 먹으면 저녁 7시 정도 된다. 이제부터 자카르타를 즐길 시간이다.
숙소를 나선다. 큰길이 아닌 골목길을 이용한다. 자카르타 골목길 구석구석에는 노래하는 배짱이 들이 많다. 한번 노래를 시작하면 5~6시간 동안 노래를 부른다. 개중에는 구걸을 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취미 삼아 노래를 부르는 이들도 많았다.
굽이굽이 골목길을 지나면 큰길이 나온다. 큰길은 교통체증 때문에 수백 대의 차들이 도로 위에 서 있다. 그래서 도로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주차장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무단횡단인 듯 아닌 듯 길을 건너 옆 동네로 넘어간다. 어제 왼쪽으로 갔으면 오늘은 오른쪽으로 간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펍이 있으면 맥주를 즐기기도 했었다. 매일 새로운 길로 다니며 주변을 구경하는 것이 내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즐기는 방법이었다.
인도네시아를 즐길수록 인도네시아에 좀 더 있고 싶단 갈망이 생겼다. 갈망이 깊어질수록 취업을 하고 싶다가 아닌 취업을 해야한다로 마음이 변했다. 취업을 위해 프로그램에서 알선해주는 면접도 다녀보고, 어학원 원장님께 상담도 받았다. 원장님은 나보고 잘하고 있다 말했지만, 성과가 없기에 내가 뭘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약속된 2달의 시간 중 약 6주가 지났다. 이제는 취업보다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야 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