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만의 외출
“형 뭐 해? 여자랑 있어? 여자는 좀 만났어?”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을 하지 말라던 동생이 3일 만에 연락이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허스키 해진 목소리가 지난 3일간 동생의 행적을 이야기해 주는 것만 같았다.
“너 목소리가 왜 그러냐? 무슨 일 있어?”
“주경야독했지.”
“낮에 일하고, 밤에는 책 읽었다고?”
“비슷해 낮에 일하고 저녁때 독서 클럽 대신 다른 클럽을 좀 다녔어.”
“예상대로네. 대단하다.”
진심으로 동생에게 감탄했다. 몇 년 전 온라인 유통업으로 사업을 시작한 동생은 몇 개의 제품을 걸치더니, 지금은 온라인 전용 두유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직원 한 명에 아르바이트생 한 명만 있는 소박한 규모라 회사일 대부분은 동생의 손을 거쳐야 한다. 영업을 나가 술을 진탕 마시는 날에도 아침 8시까지 송장 리스트를 창고직원에게 보내준다. 물어보질 않아 잘은 몰라도 지금처럼 여행을 와도 일을 손에서 놓지 못했을 것이다. 동생의 노력은 근면함이란 단어를 넘어, 광기란 단어가 더 어울린다. 그런 동생의 보며 내 무기력함이 새삼 부끄러워지고 있다. 나도 저 녀석처럼 돈도 벌고 바쁘게 살아야 할 텐데.
“그냥……. 수영이나 했어.”
멋쩍은 사실을 말한다. 지난 3일 동안 수영만 했다. 그렇다고 수영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바다가 아닌 육지를 걷는 거북이처럼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물 위에 그저 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수영장에서 비키니 입은 여자들은 좀 봤고? 됐고 이따 밤 뭐 하는데?”
“아마도 수영하고 쉬겠지?”
“아, 그, 수영은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그래 얼굴이나 보자.”
“위치는 문자로 보내놓을 테니까 6시 30분에 봅세.”
“그럽세.”
동생이 보내준 식당은 예전에 방콕에 잠시 들렸을 때 가봤던 곳이다. 그때도 동생이 추천을 받아서 갔었는데, 맛있게 잘 먹었던 기억이 난다.
콘도에 짐을 푼 지 3일 만에 첫 외출을 한다. 꾸미고 싶지만, 입을 옷이 없다. 최대한의 꾸밈으로, 면도를 한다. 약간의 설렘을 갖고 도착한 낯익은 골목, 그리고 낯익은 간판. 낡은 테이블에 앉아 낡은 벽을 바라본다. 벽에는 벽지 대신 수많은 단골의 인증사진으로 채워져 있다. 가게의 낡음이 식당의 품격을 높여준다. 벽에 붙은 인증사진을 구경하며 동생을 기다린다. 주문이 늦어지자 종업원이 옆에서 은근한 압박을 준다. 먼저 시켜 시켜야 하나 고민이 할 때, 동생이 도착했다.
“형 시켰어?”
“아직.”
“에이 뭘 고민해 여긴 똠얌 라면이지.”
당연히 시켜야 할 게 있다는 말과는 다르게 자리에 앉으며 메뉴판을 펼쳐본다.
“아니! 여기도 렝쎕파네? 형 이거 먹어봤어? 이것도 하나 시키자.”
“맘대로 해.”
동생은 똠얌 라면과 렝쎕을 시켰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을 때 약간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라면의 가격은 예전과 같았지만, 내 기억보다 새우가 작아졌고, 계란도 반쪽만 들어가 있었다. 내심 속으로 맛이 변한 게 아닐까 불안해하며 국물을 맛본다. 국물이 혀에 닿는 순간 불안감이 가신다. 3년 전 먹었던 바로 그 맛이다. 토핑은 줄었어도 맛은 변하지 않았다.
코코넛 밀크가 적게 들어간 똠얌 국물은 새콤함을 넘어 경상도 사투리로 쌔그러운 수준이다. 하지만, 이 쌔그러움이 맛이, 자극적인 매콤 달콤 그리고 느끼한 맛을 잡아 입안을 깔끔하게 해 준다. 쌔그러움이 자극적인 맛들을 잡아주니, 국물을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숟가락을 놓고 국물은 마시며, 젓가락을 바삐 움직인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어느새 렝쎕이 나왔다. 탑처럼 쌓인 돼지등뼈와 그 밑에 자박하게 똠얌 국물이 깔려있다.
랭쎕 밑에 깔린 똠얌 국물을 맛본다. 라면 국물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란 예상을 깨는 맛이다. 국물에는 돼지등뼈에서 나온 육수가 어우러져 라면보다 훨씬 진한 감칠맛을 뽐내고 있다. 돼지 뼈에서 나온 육수 때문에 쌔그러움이 줄어 새콤함으로 변했지만, 국물에 담긴 깊은 고소한 감칠맛이 배부름이란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운다. 양손으로 돼지등뼈를 쥐어뜯기 시작한다.
“형 맛있어?”
“진짜 맛있다.”
“그럼 형 많이 먹어 난 배불러.”
“나도 배는 부른데 계속 들어가네.”
“그러니까 지금 과식 중이란 뜻이지?”
“그런가.”
돼지등뼈가 고기 탑에서 뼈 무덤으로 바뀌면서 식사는 끝이 났다. 식사가 끝나자 동생은 본론을 꺼낸다.
“형, 내가 어제 클럽 가서 꼬신 여자애 있거든? 오늘 펍가서 한잔하기로 했는데 형도 같이 갈래?”
“내가 가서 뭐 하게."
"술이나 마시는 거지 뭘 하긴 뭘 해. 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 이 아저씨는?"
"기대 같은 거 안 해. 남녀 사이에 껴있기가 뻘쭘해서 그렇지."
"그럴 줄 알고 친구 데려오라 했으니깐 같이 가자."
전쟁통에도 사랑은 꽃핀다더니, 그 바쁜 와중에도 한 명 꼬셨나 보다. 참 부지런한 동생이다. 집에 가서 혼자 맥주를 마실 생각이었다. 어차피 마실 술, 밖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가도 그리 나쁜 선택일 것 같지는 않다. 군소리 없이 동생을 따라 술집으로 향한다.
술집에 도착한 동생은 메뉴판도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주문을 한다. 핸드폰을 바쁘게 이리저리 만지더니, 잠시 뒤 술집 입구로 상반된 이미지의 여자 두 명이 들어온다.
"헬로"
”어, 헬로“
싸와디캅 하며 인사할 줄 알았는데, 영어로 인사를 해 살짝 당황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영어를 할 줄 아는 것 같아 안심됐다. 인사를 주고받은 뒤 이목구비가 시원하게 생긴 신디는 동생 옆에 앉는다. 그리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남폰은 빈자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앉는다는 듯 의자를 살짝 바깥쪽으로 당겨 내 옆자리에 앉는다. 뭐가 싫은지 등을 뒤로 쭉 젖히고 도도하게 핸드폰만 쳐다본다. 뻘쭘하게 앉아 동생이 알콩달콩 장난치는 모습을 구경한다. 신기했다. 어제 클럽에서 알게 된 사이라고 들었는데, 저 둘의 마치 몇 달은 사귄듯한 다정함을 뽐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진 않는다. 그저 동물원의 원숭이가 연인 원숭이의 등에 붙은 벌레를 잡아주는 장면처럼 보인다. 저 둘의 애정행각에서 저 둘의 목적이 보인다. 때마침 주문한 술이 도착한다.
태국산 위스키인 쌤쏭 1L와 콜라 4병 그리고 얼음통이 도착하자 본격적으로 술자리가 시작된다. 종업원은 팁을 받기 위해 잔에 얼음을 담고 위스키와 콜라를 섞는다. 동생은 종업원에게 고생했다며, 팁으로 20밧을 건네준다. 종업원은 싱긋 웃으며 원하는 걸 얻었다는 듯 자리를 떠난다. 신디는 자연스럽게 샷 잔에 위스키를 조금씩 따라 술 게임용 벌주를 만든다. 전 세계 공용 게임인 가위바위보로 술자리가 시작됐다.
간단한 게임을 하다 보니 순식간에 결판이 난다. 그리고 결판이 날 때마다 패배자는 벌주를 마셨다. 몇 분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술을 반 병이나 비웠다.
술기운은 흥을 불러일으킨다. 무대 위에서 밴드가 연주하는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신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춘다. 흥에 잔뜩 취해 춤을 추고 동생의 볼에 뽀뽀한다. 게임을 주도하던 신디가 흥에 취해 춤과 동생에게 몰두하자 게임은 끝이 났다. 뭐 상관은 없다. 쌤쏭과 콜라를 내 잔에 따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폰이 내 손에 있던 콜라를 낚아 채 내 잔을 채워준다.
"Thank you"
감사하단 말과 함께, 이번엔 비어있는 남폰의 잔에 쌤쏭을 따르려 하는데, 남폰은 배시시 웃으며 한 손으로 술을 막고 콜라로 잔을 채운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가득 차 있는 잔을 가리키며 말한다.
“쌤쏭.”
피식하며 헛웃음이 삐져나온다. 남폰은 여태껏 벌주 대신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떠있다. 술은 마시지 않았어도, 분위기에는 취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