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하노이를 들리다.
남자로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서지 않는다.
사람이 마음이 꺾이면 욕구가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처음에 들었을 때 진짜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막상 그 입장을 맞닥드려보니, 그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는 수도자는 일생을 바쳐 욕구를 없애려 노력한다는데, 나는 실패를 거듭하며 손쉽게 성욕과 호기심을 잃었다. 그래서 급작스레 정해진 여행에도 별 관심이 없다. 일정도 숙소도 그리고 가서 뭘 할지도 정하지 않는다. 동생에게 연락이 안 왔으면 싶기도 하다. 하지만 늘 반갑지 않은 건 늘 내게 온다.
"형, 항공권, 숙소비 90만 원 하고 여권 사진 찍어서 보내도. 비행기 예약하려면 필요하니까. “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동생이 다 준비해 놓은 모양이다. 생각 없이 동생이 달라는 것들을 넘기고 돈을 보냈다. 일정이 며칠일지 숙소는 어떨지 물어보는 것도 피곤하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9월에 가서 형은 한 달 살고, 난 10일 정도만 있다 추석 때 오는 거로 예약해 놨어."
"거기서 한 달씩이나?"
"내 생각 같아선 형은 한 달 아니고 한 석 달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경비 때문에 한 달만 잡아놨어. “
동생이 보내준 숙소 사진을 보니, 동생은 호텔, 나는 수영장이 딸린 콘도였다.
"그리고 방콕 가기 전에 하노이에서 환승하면서 하룻밤 자고 가거든? 거기서 때 빼고 광내고 넘어가자. 옷도 좀 사고"
"어디 소개팅 가냐?"
"형이 그러니깐 안 되는 거야. 꾸며야 여자가 꼬이지."
"어차피 그런데 가서 여자 만나는 거 다 돈 아니냐?"
"형 같은 아저씨들이나 돈으로 하지, 난 사랑이지."
"너랑 나랑 한 살 차이 밖에 안 나. 그리고 밖에 나가면 나를 더 동안으로 봐."
"거~참. 배 나왔으면 아저씨지 뭘 따져."
맞는 말이다. 망한 식당의 상징이 된 볼록 튀어나온 배를 만진다. 씁쓸하지만 동생 말이 맞다. 3년 동안 난 변명의 여지도 없는 아저씨가 됐다.
"그렇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출국날짜가 내일로 다가왔다. 몇 시간 남지 않은 지금 내일 공항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또다시 고민이 된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공항에 안 올 거 같어, 와서 자고 같이 가자. “
동생은 거의 나를 반려견 수준으로 보살펴 준다. 대학교 다닐 때 많이 챙겨 준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알았으니 따지고 보면 거진 20년 지기다. 그동안 녀석에게 잘해준 기억이 없는데, 나를 챙겨주는 동생에게 너무나 고맙다.
다음 날 아침 동생의 손에 이끌려 김해공항에서 하노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식으로 베트남식 덮밥과 베트남 맥주를 마시니 여행을 떠나긴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노이 공항을 나와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숨을 크게 들이마셔본다. 동남아 특유의 매연 가득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힌다. 베트남이 확실하다.
"그래도 나오니깐 좋지? 일단 숙소 가서 짐만 놔두고 바로 밥 먹고 옷 사러 가자. “
사실 이번에 여행을 준비하면서 예전에 입던 웃을 꺼내 입어 봤는데, 살이 쪄서 맞는 옷이 없었다. 쇼핑이 필요하긴 했지만 미딩에 짝퉁 제품이 부담스러웠다. 정품이라면 몇백만 원에서 몇천만 원도 할 제품들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내 처지에 명품은 어울리지 않는데 그게 짝퉁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뭐가 됐건 새 옷을 산다는 행위가 너무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동생 뒤에 멀뚱히 서 있다, 일단 한번 입어 보라는 점원을 말에 제일 큰 사이즈로 셔츠를 입어 본다. 옷이 작다. 괜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짝퉁 옷조차 내게 맞는 게 없다. 셔츠도, 바지도. 그저 고민거리에 불과했다.
"괜찮아. 방콕 가면 이런 데 또 있어. 거긴 서양 사람들 많아서 사이즈 있을 거야. “
쇼핑백을 잔뜩 든 동생이 위로해 준다. 양손 무겁게 옷을 들고 있는 게 민망한지 실실 웃으며 재미난 제안을 한다.
"형, 숙소 근처에 한국 돈 2만 5천 원에 2시간 동안 소주, 맥주 무한으로 주는 데가 있다는데 갈래?"
"글쎄, 내일 아침 7시까지 공항 가는 데 괜찮겠어?"
"걱정 마. 적당히 마시면 되지."
"무한이라며?"
"뷔페 가서 토할 때까지 먹는 무식한 사람 아니잖아. 형. 음식이든 술이든 먹는 사람이 조절하는 거지 뭐."
맞는 말이다. 요즘 술이 없으면 잠을 잘 못 잔다. 어제 동생 눈치 보느라 술을 못 마셔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나마 비행기에서 주는 맥주를 마시고 눈을 좀 붙여 지금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술, 그래 오늘 밤 자려면 마셔야지.
"가자."
동생을 따라 골목길을 들어간다. 이런 곳에 술 무한리필 집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지만,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었다. 동생은 화려한 간판에 KARAOKE라 적혀있는 가게에 잠시 멈추더니, 가드에게 몇 마디 한 후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유가 있을 거라며 뒤를 따른다. 가게 안에서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야, 나 이런 거 싫다."
"있어 봐 그냥 술띠라 주는 애들이 있구나 하면 되는 거지. 뭘 또 그리 뺍니까. 애들 TC는 내가 낼게."
유흥업소가 처음은 아니다. 아니, 노래방이나 단란주점 같은 유흥업소는 보통 사람보다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직장인이던 시절 거래처 사람들을 접대하기 위해 뻔질나게 들락날락했었다. 회사 단골 단란주점도 있었고, 그곳 마담 누나와는 일을 그만두고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했었다. 하지만, 난 그곳이 늘 불편했었다. 쾌락을 위한 공간에서 여자는 웃음을 팔며 돈을 벌었고, 나는 자존심을 팔며 실적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단란주점을 갈 때마다 몸을 파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그런데 그런 곳을 사업을 망하고 나서 내 돈 내고 찾아오다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들이 끊임없이 들어와 방안이 가득 채운다. 저 여자들 중에 한 명을 골라야 한다. 여자들은 선택을 바라며 나를 바라본다. 눈을 크게 뜨고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여자. 환한 미소를 짓는 여자. 수줍음을 연기하는 여자. 여자들은 각양각색의 행동을 하며 자신을 뽐내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유독 눈이 가는 여자가 한 명 있다. 여자는 쓸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뭔가에 홀린 듯 그 여자를 지목했다. 여자는 터덜터덜 걸으며 내 옆에 앉는다. 웃음을 팔러 왔음에도 자신을 파는 게 굉장히 귀찮은 듯 보였다.
"이런데 싫어한다드만, 여자는 바로 고르네? 하하하"
함박웃음과 비웃음이 섞인 웃음을 한 귀로 흘리며, 번역기로 여자에게 말을 건다.
"무슨 일 있어요?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네요."
"예? 저 지금 굉장히 기분 좋은데요?"
여자의 말을 듣고 다시 여자의 얼굴을 살펴본다. 여자의 말대로 여자는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 홍조가 피어있다. 붉은 볼 터치와 붉게 홍조가 겹쳐 마치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보였다. 이상하다. 좀 전에 잘못 봤나?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니 그제야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보면 얼굴에 우울함이 묻어 나오고. 위에서 아래를 보면 얼굴에 수줍음이 묻어 나온다.
"예, 기분 좋아 보이네요."
우울함이 아닌 행복에 취한 여자다. 어째선지 흥미가 식었다. 어쩌면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쾌락을 위해서도 오지만, 나처럼 자신보다 우울한 이를 찾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여자의 손에 든 소주병을 뺏어 나는 나 만큼 쓸쓸한 내게 술잔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