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1. 체면에 대한 고찰
인도네시아에는 팁을 줄 때도 받는 사람의 체면을 생각해야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나라다.
인도네시아에는 지켜야 할 매너가 많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건, 팁을 줄 때는 돈을 꾸깃꾸깃 작게 접어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상대방의 손에 쥐여 줘야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선 예전에 인도네시아 문화를 배우며 체면 뭐 어쩌고 하며 들었던 것 같은데, 현지에 살면서 느낀 건, 팁 받은 거 다른 직원들하고 나눠 갖기 싫어서 몰래 받으려는 거 같은데? 하는 순수한 의구심뿐이었다. 하여튼 이들에게 체면은 중요하다.
팁을 줄 때도 저들의 체면을 생각해야 하는데, 같이 회사에서 일하면 저들의 체면을 얼마나 신경 써야 하는 걸까?
공개적인 장소에서 비난해서도 안 되고, 큰소리를 쳐도 안 된다. 화가 나더라도 상대방을 조용히 따로 불러내서 이야기해야 한다.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소리치면 아무리 상대방이 큰 잘못을 했을지라도, 상대방은 뻔뻔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이 죽자며 달려든다. 그러니 항상 유념하고 또 유념해서 조용히 타일러야 한다. 그런데, 출근 둘째 날 내 상식이 부서졌다.
출근 둘째 날 오후,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갑작스레 박 이사의 성난 목소리가 들린다.
"빡(PAK) 갈리!"
PAK 빡은 영어로 치면 Mr와 같은 뜻이다. 존중의 의미로 이름 앞에 PAK을 붙였지만, 목소리에 존중은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PHC파일 납기가 지연됐으면, 구두보고 먼저하고 현장에 알려야지! 결재 서류만 딸랑 올려놓으면 뭐 어쩌라는 거야! XX. 결제받는 게 당신일 이야! 아니면 현장에 필요한 물건 구매해서 보내주는 게 당신일 이야!"
"먼저 보고를 드리고 현장에 말하려 했습니다. 근데 이사님이 안 계셔서…."
"그럼 전화를 하든가 문자를 보내든가 했어야지! 일단 있는 만큼이라도 보내라고 해!"
"그럼 배송료가 추가로 나옵니다."
"그건 납기 못 맞춘 그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X팔 인터넷에서 물건을 사도 재고 없으면 파는 쪽에서 미안하다고 배송료 내는데 X팔 그럴 거면 앞으로 Tokopedia에서 주문해!“
참고로 혼나고 있는 갈리라 불린 남자는 경력 20년 정도 된 구매 팀장이다. 설계팀, 구매팀, 경리팀 등 20여명이 넘는 직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큰소리로 쌍욕을 들으며 혼나고 있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다들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일한다. 마치 박 이사의 고함은 이들에게 백색소음처럼 들리는 듯했다.
당시엔 저렇게 심하게 뭐라 해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나중에 갈리의 실수로 기초공사가 하루 지연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우기 직전이었기에, 그때의 하루는 우기의 2~3일 정도에 해당하는 긴 시간이었다. 한국이었으면 시말서 쓰고 감봉에 쳐해졌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악마는 소리치고 있는 박 이사가 아닌, 박 이사에게 혼나고 제자리에 돌아와 잘 때웠다는 듯 웃으며 거래처에 전화를 걸고 있는 갈리가 악마였다.
그래도 머릿속 한쪽 구석에는 인도네시아인들의 문화와 체면에 대해 배웠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저러면 안 될 텐데, 나중에 길 가다가 보복당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는 멍청하리만큼 순박하고 현실 물정 모르는 생각이었다.
코로나가 급격하게 인도네시아에 퍼지기 시작했을 무렵, 현장은 아비규환이 됐다. 코로나로 인해 실업자들이 늘어난다는 뉴스가 연신 들리는데, 현장에서는 인력난 때문에 앓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자카르타에서는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지만, 정부에서는 도시 간의 이동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업자들이 공사현장이 있는 도시로 이동하기가 어려웠다. 인력의 비대칭성이 극대화됐다. 그래서 우습게도 이 기간에 인부들 임금이 올랐다.
현장이 아비규환에 빠지니 작업이 늦어진다. 소장님과 나는 하루가 멀다고 하청 업체 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하청 업체 사장은 인도네시아 한인교회에서 20년 가까이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만큼 한인사회에선 나름대로 입지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현장 소장님도 처음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하청 업체에서 계속해서 문제가 불거지고 공기가 지연될 조짐이 보이자 소장님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결국, 거래대금 지급을 중지한다는 통보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제야 하청 업체 사장은 현장에 얼굴을 비췄다.
하청 업체 사장은 하청 업체 현장 책임자를 조용히 불러 뭐라 한다.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현장 책임자는 인부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하청업체 현장 No. 2 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한다. 당시에 짧은 인니어 실력이었지만, 내 귓가에는 Anjing 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개라는 뜻인데, 인도네시아에서는 굉장히 심한 욕이다. 가만히 보고있자니 우스웠다. 체면을 중시한다던 사람들이 결제를 안 해준다니 서로의 체면 따윈 생각하지 않고 몰아붙인다.
저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직원에게 물어봤다.
"제가 알기론,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선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거나 화를 내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그런데 바로 전에 밖에서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요?”
“저도 저 사람이 왜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질렀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아마도 화내는 사람이 Malu(부끄러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두리뭉실한 대답을 한 직원은, 잠시 뜸을 들이고 한마디를 더 덧붙인다.
"나쁜 인니인은 나쁜 외국인보다 훨씬 잔인합니다.“
수많은 상상을 하게 만드는 말이다. 그리고 본사에서 박 이사에게 욕 들어 먹던 빡 갈리가 생각이 났다. 왜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웃으며 일을 할 수 있었던가. 사무실을 울리던 박 이사의 고함은 그저 출근을 알리는 알람에 불과했는가. 어쩌면 내가 모르는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머리에 새로운 생각이 들어오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다. 체면을 중시한다는 나라에서 소소한 사기는 일상이었고, 외국인 대상의 굵직한 사기들도 때가 되면 나를 찾아왔다. 학문적인 배움은 사라지고 더러운 선입견만 쌓였다.
인도네시아를 떠나올 무렵, 체면이란, 그저 없는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변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