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을 찾았다고 생각한 순간 2막이 시작되기에
우리는 가끔, 생각보다는 자주, 자신의 삶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할 만큼 먼 남 얘기에도 기웃거린다. 그리고 또 동시에 남에게 별 관심이 없다. 글 판에 발을 들인지 며칠 되지 않은 새내기 글쟁이가 잠깐 보기에도 독자와 글작가 모두 참 이중적이다. 해피엔딩과 이별 이야기를 동시에 사랑하는 일면에서도 그런 모습이 잘 나타난다.
설렘으로 시작한 관계가 환희로 결실을 맺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요즘은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확인하고 나서 고백을 한다지만, 고백을 하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상대의 대답이 무엇이든 놀라움으로 마주할 것이다. 다툼과 화해, 조율을 반복하며 둘 사이가 긴밀해지는 시간을 지나고, 가장 취약한 모습부터 다른 누구도 모르는 멋진 모습까지 모두 들키는 순간도 올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 기적과도 같다는, 둘이 함께하는 것 만으로도 행복해질 것 같다는 확신에 찬 결혼 결심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지점을 완결로 본다면 나도 해피엔딩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나와 내 미래의 배우자 앞에는 걸어갈 길이 앞으로도 구만리다. 너무 까마득해 보이지 않는 커다란 고개도 있을 거고, 아예 내 발밑에 있어서 알아채기 어려운 유리조각이 있을지도 모른다. 결혼식도 출산도 어쩌면 비교적 작은 고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요점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해피엔딩을 원한다. 가능만 했다면 우리는 행복을 돈으로 샀을 것이고, 실제로 그와 유사한 행위를 반복하며 도파민을 얻고 살아간다. 2-30대에 바짝 벌어서 40대에 은퇴하겠다는 파이어족 생각도 난다. 그들에게는 은퇴의 순간이야 말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이어져야 할 해피엔딩일 것이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없다. 산다는 게, 어려운 고비 하나 넘기고 나서 그 나머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퉁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한 우리 모두는 모르는 것 투성이의 끝 없는 길에 놓여있을 뿐이다. 해피엔딩이라 착각했던 모든 순간들이 작은 마일스톤에 불과하고, 마일스톤인 줄 알았던 것을 다시 보니 잘못 들어선 진흙길에 남은 내 발자취에 지나지 않았던 날들을 몇 번이나 보내왔기에 우리 모두 잘 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길을 잘못 든, 잘 든 길에서도 넘어져버린, 걷다가 이게 아닌 듯 하여 돌아서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게걸스럽게 탐독한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길과 그들의 길이 완전히 다른 트랙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의 이야기에 기웃거린다. 그들의 실수에서 부상을 예방하는 법을 배우기도 하고, 이미 일어나버린 사고의 대처법에 대해 영감을 얻기도 하고, 이미 터져버린 상처를 봉합하는 방법을 전수받기도 한다. 그런다고 해서 모든 장애물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치고 깨진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다른 누군가가 지켜본다.
지금 잘 달리고 있는 나도 언젠가는 넘어질 것이다. 나는 아마 그 순간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쓸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다 보라고 글로 남기는 일을 할 용기는 당연히 없다. 하지만 나도 불행을 사랑하고 집착하며 어떻게 해서든 피하기 위해 발악을 한다. 언젠가는 잘 멈춰서기 위해서다. 넘어지지 않고서는 멈추는 일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